▲ 박서운 논설위원 울산 과학대 명예교수 © 울산광역매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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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펜젤러 선교사는 조선에 온 첫 번째 개신교 선교사로 배재학당을 설립하여 한국의 교육발전을 위해 헌신한 미국 출신 감리교 목사다. 이 분에 대한 평전을 읽다보면 흥미로운 대목이 나온다. 아펜젤러 목사는 민주당 당원이었던 부친의 영향으로 공화당 대통령 후보자에 대해 다소 비판적인 글을 기고하였는데, 이를 본 공화당원으로부터 비난이 담긴 편지를 받았다.
그 후 주고받았던 몇 차례의 논쟁이 지역신문에 게재되어 있다. 그러나 선거에서는 정작 공화당 후보인 `가필드`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아펜젤러는 후에 후보자의 정치적 방향이나 정책보다는 인물 위주로 투표하였다고 토로하였다.
이때가 1880년경이니 백 사십 여 년 전의 미국 선거 풍경을 살짝 엿볼 수 있다. 대의제 정치의 근간이 `정당`이고, 현대 정치에서 정당은 필수불가결의 정치제도로 기능하고 있다. 정당은 `신념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국익을 도모하기 위해서 만든 결합체`로 규정할 수 있다. 미국은 공화당과 민주당으로 양분되는 대표적인 양당제 국가이다.
공화당은 보수주의자, 개신교도, 남부 백인 등을 주요 기반으로 하고, 민주당은 자유주의자, 전통적 좌파, 환경운동가, 흑인, 노조 등 다양한 집단으로 만들어진다. 그러나 어느 정당이든지 모든 정당행위는 `국익`으로 귀착되어야 한다. 이것이 정당정치의 대원칙이며 이를 지키지 못하는 정당은 사실상 정치의 건전성을 좀먹는 해악이라 할 수 있다.
정당정치는 각 정당이 가지는 이념적 대립과 충돌이 가장 큰 문제로 나타난다. 미국에서도 공화당원과 민주당원은 말도 섞지 않을 정도로 서로를 미워하고 경원시 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미국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래도 문재인 정권 이전에는 `동업자정신`이라도 있어 대립 속에서도 소통의 접점은 있었으나, 요즘은 이마저도 사라져 버렸다.
국가의 중요사를 앞에 두고 초당적인 협력은커녕 비타협적인 대결이 빈번하다. 정당 간의 공격정치와 힘겨루기가 일상화되고 있으며, 더욱이 여당의 적극적 지지자들은 `문빠`, `대깨문`과 같은 해괴한 이름으로 이념적 편향성을 앞세워 자기들의 이익을 추구하고, 여기에 반하면 상대를 가리지 않고 원색적인 공격을 가한다.
특히 여당 성향의 몇몇 논객들은 극단적이고 자극적인 말로 이런 현상을 조장하고 있다. 정치적 비중도 거의 없는 음식 평론가가 "조국은 십자가 진 예수"라는 초법적인 거짓말을 거리낌 없이 할 수 있는 사회, 또 거기에 환호하는 동조자들을 볼 때 우리 사회가 정말 광기서린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앞서기도 한다. 헌법에서 법관은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재판하며 사법권은 독립되어 있음을 명백히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법관의 판결이 자신들에게 불리하다 하여 법관 탄핵을 주장하고 있는 국회의원들의 무지함을 어찌해야 하나. 게다가 이를 주장하는 위원들은 자녀입시비리, 선거개입, 자녀 인턴의혹 등의 피의자 신분이 아니던가. 결국 자신들의 허물을 덮기 위한 위장책인가? 국회에서의 추미애의 답변태도는 끝없는 분노를 치솟게 한다. 그 오만하고 거만하며, 뻔뻔한 모습은 필자의 적지 않은 나이동안 겪었던 정치인 중에서 최악이다.
CNN의 최근 조사결과 미국에서 레이건 대통령의 인기는 대단하다. 대중적인 호소력과 친화력을 겸비한 레이건은 중요한 법안을 통과시킬 때 반대당 주요 인사를 백악관에 초청하여 두 손을 마주잡으며 인간적으로 호소했다 한다. 이런 대통령을 아무리 반대당이라 하더라도 어찌 거절할 수 있었겠나. "국민과 수시로 소통하는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주요 사안은 대통령이 직접 언론에 브리핑하겠습니다. 퇴근길에는 시장에 들러 마주치는 시민들과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누겠습니다. 때로는 광화문광장에서 대토론회를 열겠습니다" 얼마나 멋들어진 뻔뻔한 거짓말인가. 새해 들어 그래도 대통령에게 일말의 희망을 가져본다. 취임사를 다시 한 번 읽어보시라고. 이 짧은 글을 쓰는 동안 `뻔뻔함`이란 단어가 자꾸 중복되는 바람에 빼느라 무진 고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