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장 행사장에 도착했습니다. 넓은 광장에 초등학생·중학생·고등학생들이 모여들었습니다. 학생들은 돗자리 위나 나무 그늘에 삼삼오오 모여서 원고지를 채워나가기 시작했습니다. 5월의 연초록 신록 아래, 고심하며 글을 쓰는 학생들 모습이 기특하고 예쁘게 보였습니다.
학생들이 원고를 완성하기 시작하자, 문학회 회원들이 파트를 나눠서 접수했습니다. 나는 초등부 운문과 산문 접수를 했습니다. 중등부 운문과 산문을 제출하는 학생들이 초등부보다 훨씬 많았습니다. 초등부 접수하면서 틈틈이 중등부 접수를 도왔습니다. 드디어 백일장이 끝났습니다. 우리 문학회 회원들은 학생들의 원고를 모아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점심시간이라 식사를 먼저 한 뒤에 심사하기로 했습니다. 내 왼쪽에는 우리 문학회에서 연세가 제일 많으신 여자 회원이 앉았습니다. 앞에도 연세 많으신 남자 회원이 앉으셨습니다. 어르신들께 찌개를 떠 드렸습니다.
식사 중, 앞 회원의 찌개 그릇이 비었는지 보려고 몸을 왼쪽으로 살짝 움직였습니다. 그때 왼쪽에 앉으신 분의 팔과 부딪혀, 수저에 있는 찌개를 식탁에 약간 흘렸습니다. 나는 황급히 물수건을 드리며 죄송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버럭 화를 내며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핀잔을 줬습니다. 뜻밖의 상황에 많이 당황스러웠습니다. 몇 번을 죄송하다고 사과하면서 죄인의 모습이 되었습니다. 회원들 역시 모두 놀라며 분위기가 썰렁해졌습니다.
덜 성숙한 어린이나 질풍노도의 시기인 사춘기 청소년들에게는 눈살 찌푸리는 상황이 발생해도, 그러려니 하며 이해의 폭이 넓습니다. 그런데 연세가 많으신 어르신께는, 좀 더 큰 그릇을 기대하는 심리가 있습니다. 어르신들은 자상하고 후덕하고 아량이 넓을 것으로, 스스로 정해놓았던 것 같습니다.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실수인 상황에서, 지나치게 화를 내는 모습에 당혹스러우면서 실망스러웠습니다. 더군다나 선배 문인이라 좀 더 높은 기대치를 갖고 있었나봅니다. ‘나 같으면 괜찮다고 할 텐데…’ 하는 아쉬움과, 앞으로 나이를 먹을수록 좀 더 덕을 갖춘 어른이 되기 위하여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왕 먼 지역까지 백일장 심사를 온 김에, 저녁에 개최되는 축제 개막식과 축하 행사도 보기로 했습니다. 혼자 시간을 보내던 남편과 합류하였습니다. 아직 개막식까지는 시간 여유가 많았습니다.
지자체에서 조성한 ‘맨발 걷기 길’로 갔습니다. 황토 흙길이 단단해서 걷기가 불편했습니다. 한 바퀴를 돌아오니, 좀 전까지 단단했던 황토 흙길이 말랑말랑해져 있었습니다. 의아해서 보니, 연세 많고 왜소한 여자 어르신이 호스로 물을 뿌리고 계셨습니다. 단단한 황토를 보며 아쉬운 마음만 가졌을 뿐, 물 뿌릴 생각을 하지 못한 점이 반성이 되었습니다.
감사 인사를 드리자, 그분도 유쾌하게 웃으며 함께 인사를 하셨습니다. 봉사하는 어르신의 모습이 멋지게 보였습니다. 오지랖 부리지 말자고 수시로 하던 다짐이 흔들리는 순간이었습니다.
하늘 위에서 끊임없이 비행기 굉음이 울렸습니다. ‘에어쇼’ 예행연습 중이었습니다. 무슨 일로 이렇게 비행기가 시끄러운지 모르겠다며, 어르신들이 웅성거리며 불안해하셨습니다. 내일 행사 예정인 ‘에어쇼’에 대하여 설명을 해드렸습니다. 그러자 재미있겠다며 몇 시에 하는지 물어보셨습니다.
급히 스마트폰으로 축제 프로그램을 검색해서 시간을 알려드리니 무척 고마워하셨습니다. 시골의 따뜻한 할머니 분위기의 어르신들과 함께하며 마음이 훈훈해졌습니다.
행사장으로 향했습니다. 이미 앞자리는 모두 채워져서, 중간 정도에 앉았습니다. 개막식 행사가 시작됐습니다. 멀리에서 참석한 내빈들의 인사말이 너무 길어지는 바람에, 뒤를 이은 축하공연이 많이 지체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기온이 급격히 떨어졌습니다. 쿵쾅거리는 음악 사이로, 너무 춥다는 이야기가 들렸습니다. 뒤를 돌아보니 옷을 얇게 입은 어르신이 웅크리고 계셨습니다. 평소에 추위를 많이 타서 옷을 여러 겹 입고 왔기에, 제일 따뜻한 패딩 조끼를 벗어드렸습니다. 추위에 떨던 어르신은 고맙다며 급하게 입으셨습니다.
축하공연이 계속 이어졌습니다. 너무 늦기 전에 집으로 출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패딩 조끼를 입고 유명 가수들의 노래에 힘차게 박수치며 즐거워하시는 어르신의 모습에, 바로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그렇게 밤은 깊어지고, 불꽃 쇼를 마지막으로 성대한 축하 행사가 끝났습니다. 따뜻하게 공연을 잘 봤다며 패딩 조끼를 건네시는 어르신의 화사한 미소가, 오래도록 여운으로 남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