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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충숙공 동상 국립외교원에 세운 이유
 
정종식 기자   기사입력  2015/03/26 [16:36]
울산 출신 조선 통신사 충숙공 이 예 선생의 동상이 25일 국립 외교원 앞뜰에 건립됐다. 국립 외교원은 정예 외교관과 국제 업무역량을 갖춘 공직자들을 양성하는 곳이다. 그런 곳에 공(公)의 동상을 세웠다는 것은 선생이 단순히 조선조 대일 외교관이었기 때문이 아니다. 세대 계층 간 갈등, 경색 국면을 거듭하고 있는 한일 관계를 푸는 데 선생의 삶의 지혜가 필요하기 때문 일 것이다.

선생이 정식 외교관으로 활약하기 시작한 15세기 초는 조선조의 기틀이 잡히기 시작해 신분제가 비교적 엄격했다. 그런 상황에서 중인 계급인 아전출신으로 대일 외교에 참여해 결국 종2품에 까지 올랐다는 것은 그 당시로선 파격적인 일이었다. 세종은 대일 관계 해법을 찾으면서 “일본에 머무르고 있는 이 예가 돌아 올 때까지 결정을 미루자”고 했을 정도로 선생의 견해를 중시했다.

선생의 대일 외교전략 대강은 소통과 실리였다. 충숙공이 외교 일선에 나설 당시 조선조정은 일본을 왜(倭)라며 오랑캐로 여겼다. 하지만 선생은 일본 측을 정상적인 외교 채널로 인정하고 그들과 타협하는 방식을 통해 왜구에 끌려간 백성들을 쇄환하는 등 실리를 취했다. 또 그를 통해 일본 측의 움직임을 정확히 파악하고 조정에 대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런 덕택에 선생이 대일 외교를 담당하고 있을 때만 해도 왜구들의 남해안 노략질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선생의 외교적 업적뿐만 아니라 삶에 대한 정신이다. 자신이 맡은 일에 대한 열정이 조선 시대의 신분제도를 뛰어 넘게 했다.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선생으로 하여금 험난한 해로(海路)를 수십 번이나 오가게 했다. 근무조건이 조금만 열악해도 중소기업을 박차고 나가는 요즘 젊은이들이 선생의 처지에 있었으면 어떻게 할까. 병영(兵營)생활을 못 견뎌 스스로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하는 병사들에게 돛단배를 타고 현해탄을 수십번 왕래하라고 하면 그들의 반응은 어떨지 궁금하다.

국가를 대신해 해외로 나가는 젊은이들은 선생의 외교지략과 끈기, 통찰력을 배워야 한다. 논리에만 뛰어날 게 아니라 현장을 통해 사실을 파악하고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도 갖춰야 한다. 특히 지금처럼 국제외교가 국운을 좌우하는 시대에선 선생의 대일외교 방식 전반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새로 건립된 동상을 통해 600여 년 전의 충숙공을 되 새겨야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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