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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은 전략요충지였다
 
정종식 기자   기사입력  2015/05/19 [17:51]
북구 달천지역에 있는 노인들은 아직도 관문성 일대를 ‘가무이’라고 한다. 그래서 북구 달천동과 중산동 일원에 있는 마을을 노령 층들은 ‘가무이 마실’이라고 부른다. 울산과 경주 경계지점에 일부 복원돼 있는 관문성을 이 지역 거주민이나 관련학자들은 비교적 잘 안다. 그러나 다수 시민들에겐 낯설다. 특히 현대사에서 이 지역이 어떤 이슈로 떠올랐는지는 지역 전문가들이나 역사학자들조차 잘 모른다. 반면 관문성의 역사성은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다.
 
관문성은 알려진 대로 통일 신라 성덕왕 21년(AD 772년)에 축조됐다. 삼국 통일(AD 676년)을 1백여 년이나 지난 시점에서 울주군 두동면 치술령에서 북구 대안동 바닷가까지 장장 12ĸm에 이르는 장성을 쌓은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역사학자들은 선덕왕이 즉위한 AD 780년부터 멸망하는 AD935년까지를 통일신라 하대(下代)로 분류하고 있다. 7세기 삼국통일을 완성한 뒤 1백여 년간 태평성세를 누린 신라는 이 시기에 접어들면서 왕위 계승권을 두고 귀족들이 암투를 벌인다. 제44대 민애왕은 1년 남짓 왕위에 있다가 피살됐을 정도다. 이렇게 국정이 문란해지면서 1천년 왕국은 황혼기로 접어들었다.
 
반면 고구려 유민이 세운 발해는 건국(AD 698년)이후 중흥기를 맞았다. 이후 강국으로 성장한 발해는 신라의 북부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당시 신라의 명목상의 경계선은 지금의 청진까지 뻗어 있었지만 실질적인 통치권역은 강원도 북부에서 그치고 있었다. 이런 발해의 압력에 대비해 AD 721년에 하슬루(지금의 강릉)에 성곽을 축조했고 남으로는 잦아지는 왜구의 침략에 대비해 다음해에 관문성을 축조했다. 통일신라 내내 잠잠했던 왜구의 노략질이 다시 시작되면서 수도 경주로 통하는 길목을 방어하기 위해 관문성을 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울산 지역민들 치고 관문성에 대해 이 정도 아는 사람은 적지 않다. 그러나 이 관문성이 축조된 지 1천 2백여 년 만에 다시 역사의 전면에 잠시 등장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많다. 1950년 9월 4일 영천 방면에서 낙동강 교두보를 사수하고 있던 국군 8사단이 북한군에게 패퇴하자 영천 방어선이 무너졌다. 당시 미군은 마산, 창령, 왜관에 이르는 서부 전선을 담당했고 국군은 칠곡, 영천, 포항을 잇는 중동부 전선을 맡고 있었다. 북한군은 9월15일까지 부산을 점령할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으나 국군과 미군의 저항에 부딪쳐 낙동강 전선에서 멈칫거리고 있었다. 이렇게 낙동강전선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북한군은 화력이 약하고 전투 경험이 부족한 국군 쪽을 집중 공격했다. 특히 9월15일까지 부산을 점령하라는 김일성의 다그침을 받은 북한군 15사단이 영천을 집중 공략해 국군 8사단이 영천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영천 전선이 뚫리면 대구와 포항 사이를 뚫고 내려온 적에게 아군이 뒤에서부터 포위 공격을 당해 왜관 지역을 사수하던 미 8군 사령부까지 위협받을 처지에 놓이게 될 판이었다. 자칫하면 대한민국이란 국가가 지도상에서 사라질 위기에 처한 것이다. 이때 미 8군 사령관 워크 중장은 무기력하게 무너진 한국군을 질책하며 서둘러 제2의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고 이 방어선마저 무너지면 본토로 철수할 계획을 세웠다. 이 방어선이 바로 울산 북쪽 관문성 일원에서부터 경상남북도의 도계를 따라 함안까지 이어지는 약 90ĸm 의 ‘데이비드 선’이다.
 
이 방어선은 당시 미 8군 공병참모 데이비드 슨 준장의 지휘아래 구축됐다고 해서 그의 이름을 따 붙여진 것이다. 한국전쟁 개전 이래 최대의 위기에 몰린 미군은 당시 부산항과 수영비행장을 미군 최후의 철수 지점으로 택하고 있었다. 미군은 ‘데이비드 선’을 구축하면 사실상 한반도 미군 철수를 계획했고 이는 미국의 ‘대한민국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또 더 이상 반격하기보다 철수를 위한 시간벌기 작전에 돌입하는 셈이었다.이 절제절명의 순간에 부산 방어를 위한 최후의 저지선으로 울산 북부가 등장했다. 부산을 배후에 두고 배수의 진을 칠 미8군이 어디에 임시 사령부를 마련할 것인가를 논의했는데 울산이 유력 후보지로 떠올랐다.
 
물론 이 계획은 유엔군의 인천 상륙으로 실현되지 못했다. 하지만 벽안의 파란 눈을 가진 이방인에게도 관문성에서부터 서쪽으로 뻗어가는 전선이 방어 요충으로 보였던 건 사실이다. 데이비드 준장이 1개 소대 병력을 대동하고 관문성이 있는 지점에서부터 서쪽으로 직접 지형 정찰을 한 뒤 내린 결론이라고 하니 울산은 시대를 초월한 방어진지였음이 틀림없다.요즘 모 공중파 방송에서 ‘징비록’이 방영되고 있다. 정유재란 당시 울산 왜성에서 조선·명· 왜군이 국제전을 벌였다. 일본으로 완전철수를 노리던 가등청정과 이를 저지하려는 조명 연합군의 봉쇄작전이 처절하게 펼쳐진 곳이 바로 울산이다. 울산은 통일신라 시절엔 왜구로부터 나라를 지키는 요충이었고 중세에 들어선 동북아 국제전의 현장이었으며 현대사에 들어서는 공산집단으로부터 국가를 지키는 주요 방어지점이었다. 운명처럼 타고난 지정학적 방어 요새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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