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텃밭인 주말농장에도 가을이 찾아옵니다. 보라색 가지가 반짝이며 주렁주렁 열리고, 장맛비에 속절없이 떨어지던 호박도 화사한 햇살에 살이 통통하게 오릅니다. 풋고추를 따먹으려고 한 줄 심은 고추도 서로 앞다투어 빨갛게 익어갑니다.

  오늘은 백로와 한로 사이에, 음력으로 8월이고 양력으로는 9월 23일입니다. 절기상으로는 추분(秋分)으로, 24절기 가운데 열여섯째 절기로 낮과 밤의 길이가 같은 날입니다. 오늘을 기준으로 밤의 길이가 점점 길어지며 가을도 그만큼 깊어갑니다.
 
  《철종실록》 10년(1859년) 기록에 보면 추분 날 종 치는 일조차 중도의 균형 감각을 바탕에 깔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추분’은 그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는 곳에 덕(德)이 있다는 뜻의‘중용’과 일맥상통하는 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의 관계란, 멀리 하면 서운한 감정을 가진 채 소원해지고, 너무 가깝게 지내면 친구나 동료가 하루아침에 실망하여 관계가 악화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게 오해든 배신이든 관계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충격은 더 클 수밖에 없습니다. 

  공자는 중용을 ‘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는 적당한 상태’라고 정의하고, 항상 중용을 유지할 것을 역설했습니다. 공자는‘중용의 덕’을 최고의 덕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경제학에서 말하는 수요와 공급의 이치도, 남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딱 알 맞는 상태가 바로 적당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너무 가까이도 하지 말고 너무 멀리도 하지 마라’는‘불가근 불가원(不可近 不可遠)’역시 적당함의 덕목과 상통하는 말이 아닐까 합니다.

  서양에서의 중용의 덕은, 아리스토텔레스가‘진정한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이성으로 욕구나 감정을 잘 조절하여 중용의 덕을 쌓아야한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용기(勇氣)란 무모하지도 않고 겁을 먹지도 않는 상태라 했고, 절제(節制)란 방종도 아니요, 무감각하지도 않은 상태라 했습니다. 그리고 관대(寬大)함이란 낭비도 인색도 아닌 상태고, 긍지(矜指)란 오만하지도 않고 비굴하지도 않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을 철칙으로 삼을 때 비로소 좋은 관계를 지속할 수 있는 경우를 많이 겪곤 합니다. 기대했던 존경과 사랑의 감정 대신에, 가까워질수록 실망을 주거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입니다. 풍경도 그렇고, 사람의 마음도 그렇고, 감동의 마음을 품었던 일 또한 가까이서 보면 멀리서 볼 때와 다른 경우가 많습니다. 티베트의 존경 받는 수도승(修道僧) 인 ‘아나가리카 고빈다’는,‘산(山)의 위대함은 거리를 두어야 보인다.’라고 했습니다.

  더불어 추분엔 향에 대한 의미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추분의 들녘에 서면 벼가 익어가며 구수한 냄새가 나는데 그 냄새를 한자로‘향(香)’이라고 합니다.‘벼 화(禾)’자와 ‘날 일(日)’자가 합쳐서 만들어진 글자입니다. 한여름 뜨거운 해의 사랑을 받으며 자란 곡식은 온 몸으로 진한 향기를 뿜어냅니다. 사람도 이렇게 진한 향기를 뿜어내는 경우를 접하게 되면 감탄과 함께 존경하는 마음이 절로 솟아납니다.

  덕을 쌓은 사람이 겸손함으로 고개를 숙이는 것과, 익은 곡식이 고개를 숙이는 것이 일맥상통하게 느껴집니다. 이렇게 추분은 중용과 내면의 향기와 겸손을 생각하게 하는 아름다운 절기입니다. 그 멋진 날이 바로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