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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성제 수필가   기사입력  2016/10/10 [17:46]
▲ 설성제 수필가    


잠을 좋아한다. 특히 아침잠을 좋아한다. 아침 6시부터 9시 정도 사이의 잠은 그 어떤 보약에 비할 수 없는 특효약 같다. 밤을 새워도 이 시간에 잠을 자면 하루가 거뜬하다. 아무리 밤새 잠을 자도 이 시간에 자지 못하면 하루를 개운하게 보내기가 힘들다. 그러나 세상이 어디 잠만 자게 가만히 내버려두랴. 어서 일어나서 해야 할 일을 하고 하루하루 순간순간을 열심히 살라고 엉덩이를 걷어차지 않던가. 마지못해 잠을 깨고 눈꺼풀을 열어 몸을 일으키는 만큼 힘든 일이 없지만 또 발딱 일어나면 하루는 기운차게 흘러가는 것 같다. 


그날도 어쩔 수 없이 일어났다. 비가 내리는 아침이었다. 태풍 ‘차바’가 올라온다고 했다. 딸을 직장에 데려다주고 스타디에 참석해야했다. 그런데 딸을 내려주고 돌아오는 길, 바람이 범상치 않았다. 비바람에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스타디는 쉰다는 메시지가 날아들었다. 웬 떡! 비 오는 아침이야말로 이런 꿀떡이 없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늘어지게 잠을 잤다. 방음이 잘 된 우리집은 그야말로 낙원이었다.
한참을 자고 있는데 여기저기서 수십 통의 문자와 전화가 날아들었다. 비 오는 날이니 부침개를 구워먹자는 소리부터 일을 접고 집으로 돌아간다는 문자에 옴짝달싹 못하고 어딘가에 발이 묶였다는 문자까지. 그새 무슨 난리가 났단 말인가. 창문을 열어보니 길가에 도랑을 파놓은 듯 물이 콸콸거리며 흘러가고 있었다. 이미 억수비는 멈추었고 여우비가 배시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이 무슨 말인가? 강이 범람 직전이라니. 모바일로 날아드는 소식이 갈수록 태산이다. 순식간에 일어난 사건 사고가 끝없이 올라왔다. 차들은 엎치락뒤치락 서로 어깨를 올라타고 물 속에 잠겨 있는 모습, 어느 곳엔 하천과 도로가 하나가 된 모습, 어떤 사무실은 쓸려온 나뭇가지와 컴퓨터와 온갖 잡동사니들이 둥둥 떠다녔다. 상가 앞 도로에는 비가 쓸고 간 자국 위로 온갖 생필품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얼른 옥상으로 올라갔다. 태화강은 황토빛으로 넓디넓어져 있었다. 코스모스밭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십리대숲이 긴 꼬리처럼 둥둥 떠 있을 뿐이었다. 도롯가에 나온 사람들이 개미처럼 꼬물꼬물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아, 나는 순간 무릎을 꿇었다. 천하태평으로 잤던 잠이 원망스럽기 그지없었다. 게다가 밀려오는 해괴망측한 죄책감에 눈물이 쏟아졌다. 나는 왜 잠을 자고 있었단 말인가. 깨어있어도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깨어있지 못했다는 사실만으로 내 존재가 이 폭우 속에 상실된 것만 같았다. 그렇게 떠들썩했을 하늘과 세상을 모른 채 깊은 잠에만 빠졌던 나 자신이 용서 되지 않았다. 쏟아지는 폭우를 안타까워하고 수해를 걱정하는 마음을 그순간 보태지 못했다는 것이 견딜 수 없었다.


깨어있어라. 늘 깨어있어라는 말이 생각난다. 나는 한참 움직여야 할 시간에 잠을 잔 것도 그러하거니와 태풍 앞에서도 정신의 눈을 감고 있었다는 것에 스스로 통탄이 일어났다. 어디 이 태풍과 홍수뿐인가. 일전에 지진으로 떨었던 날이 생각났다. 말로만 듣던 지진, 이웃 나라 먼 나라의 이야기로만 듣다가 땅이 흔들리고 갈라지는 일이 실제 일어났다. 나한테는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방심이 어디에서 왔는지. 한 치 앞을 알 수 없이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뒤로한 채 깊은 잠에 빠져 이런 불감증을 더 쌓아가게 만들었던 것은 아닌지.
불과 십여 초의 시간 동안 땅이 흔들리는 공포를 체험한 지가 바로 며칠 전이었는데 다시 수해를 당한 모습에 덜덜 떨리기까지 했다. 분명 자연의 일이라고만 여기기에는 왠지 찜찜하다. 죄가 넘치면 땅이 입을 벌려 세상을 토해버린다는 것을 들어왔음에도 우리 삶에 돌이킴이 없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잠에서 깨야할 시간이다. 억지로라도 깨어서 정신을 차려야할 때인 것 같다. 이렇게 깊이깊이 잠만 자다가, 잠 속 달콤한 꿈속만 헤매다가 어느 순간 문득 잠에서 깨고 보니 온 세상이 흔들리고 잠겨 있다면 그땐 어찌할 것인가. 속수무책, 한 마리 개미와 다를 바 없는 인간이 피할 길을 만들 수 없을 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잠들지 않고 깨어있다면 문제가 무엇인지는 알 것이며 그 문제를 풀어가려는 준비는 할 수 있을 것이다. 
여태까지 잠을 잤지만, 이토록 죄 된 잠을 자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지금이라도 일어나 수마가 할퀸 자국을 어루만지며 자연의 위력과, 자연을 다스리는 그 위력 앞에 항상 깨어있기를 원한다. 잠들지 않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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