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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림 없는 마음결
 
최영주 수필가   기사입력  2017/04/27 [14:25]
▲ 최영주 수필가     © 편집부

 사월 초파일이 다가오면 태화강변과 다리난간으로 연등이 내달린다. 색 고운 등꽃들이 바람결에 흔들려 물무늬를 이룬다. 불 밝힌 연꽃들이 도시의 밤에 떠올라 세상은 일찌감치 해탈을 한다.
시골집 안채 기둥엔 네 면이 유리로 된 호롱등이 걸려 있었다. 방학 동안에 가서 외사촌들과 저녁을 먹고 아랫마을 고모댁에 놀러갈 때면 기둥의 등을 벗겨 불을 붙여 들고 나섰다. 등불에서 나아간 빛이 어두운 밭둑가에 적막하게 엎드린 산의 어깨도 물끄러미 드러나게 하고 시냇물을 함께 짚어 따라오는 솔밭의 웅얼거림도 눅어들게 했다. 아무리 눈을 비벼 크게 떠 봐도 먹물이 꽉 찬 듯 캄캄한 그믐밤에도 등불에 의지해 무서움을 떨쳐내며 두런두런 걸어갔다.


막막한 어둠 속을 무탈하게 지나가도록 등불을 밝혀주는 사람들이 있다. 지난해 연말 갑자기 코피가 쏟아져서 119구급대에 실려가 응급처치를 받는 소란이 있었다. 그런 나를 두고 한의사인 친구가 그랬다. 코에 피가 나지 않고 뇌나 심장의 핏줄이 터졌다면 나는 이미 이쪽 사람이 아니거나 반신마비가 되었을 거라며 천만다행이라고 했다. 그 얘기를 듣는 내게 까맣게 잊고 있던 48년 전의 기억이 아스라이 떠올랐다.


대학 입학을 앞두고, 고등학교 때 코피를 자주 흘리던 나를 데리고 어머니는 이비인후과 병원에 갔다. 그 시대 새로 개발된, 코 속의 약한 핏줄 교차점마다 땜질을 해서 핏줄이 터지지 않게 하는 시술법을 원장한테 부탁했다. 어머니로선 우선 코피를 안 나게 하는 것이 최선의 처방이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하지만 원장은 앞으로 내가 나이 들면서 사는 동안 코피가 터져버리는 것이 더 나은 순간이 생길 수도 있다며 선뜻 해주지 않았다.


병원에 다녀온 뒤 입시공부 스트레스를 벗어나서인지 코피를 흘리는 일 없이 평생을 지내왔다. 그 의사 선생은 치료비도 듬뿍 받는 새로운 의술로 시술해주어도 되었을 텐데, 내 인생의 먼 먼 후일을 미리 내다보는 혜안이 있었던 것 같다. 의술을 인술로 베풀어 주었음을 이 긴 세월이 지나서야 알게 된다. 코피를 그토록 흘리고도 몸에 별다른 징후 없이 이렇게 잘 지내고 있는 것은 그 선생 덕분이다. 내 생의 밝은 등불이 되어준 분이다.


미약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 사람이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가 몸에 들어와서 속절없이 죽기도 하고 어디선가 윙- 하고 날아든 한 마리의 말벌에 쏘여도 자칫 죽음을 맞게 된다.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오는 계절을 전환시키는 음력 이월에 부는 북서계절풍도 바람을 타고 오는 영등할매로 모셔 들여 몸을 굽히고 마음을 간곡히 모았다. 바람을 안고 씨를 뿌려야 하는 농부들과 바람 속 사나운 파도에 배를 띄워 고기를 잡아야 하는 어부들은 변덕스럽게 방향을 바꾸어 치닫는 북서계절풍을 달래려 정성으로 제를 올렸다. 농업, 어업과 상관없는 사람들도 새치름하게 파고드는 계절풍에 독한 감기나 질병에 걸리지 않고 무탈하게 해달라고 음식을 차려놓고 간절히 비손을 했다. 사람은 한 치 앞을 모르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내다볼 줄 모르기에 깜깜할 수밖에 없는 세상, 그래서 초파일 연등은 저리도 환히 먼 곳을 밝힌다.


결혼 전 초파일에 친구들과 연등을 들고 제등행렬에 섞여 시내를 걸었던 적이 있다. 신도들이 모여앉아 지성으로 만들었을 연등에 촛불을 켜니 석가의 자비가 분홍 연꽃으로 피어났다. 등이 제 몸을 둥글게 말아 불을 지켰다. 작은 불꽃이 고요하고 편안하게 타올랐다. 등은 흔들리는 불꽃을 차분히 앉혀 소망의 등불이 되었다. 촛불을 품고 태어난 꽃등이 사방에 품 넓은 빛을 퍼뜨렸다.


촛불 하나로도 온 방을 빛으로 채운다. 하지만 등불은 자기만의 방에서 기꺼이 나와 주위를 밝히고 길을 비추어 여러 사람들이 나아가게 도와준다. 한 사람이라도 더 빛 속에 들게 하려면 등불을 든 사람은 팔을 최대한 높이고 앞서서 걸어가야 한다. 계속해서 똑같은 자세를 취하자면 불편하고 힘이 든다. 그럼에도 변함없고 꿋꿋한 불빛 한 점 더 많이 퍼져나가게 손목에 힘줄을 세운다.
“민들레는 장미를 부러워하지 않는다.”는 화엄경의 말씀을 떠올리며 등불 앞에 서면 나는 더없이 평안하고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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