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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 바지
 
강이숙 시인   기사입력  2018/01/21 [15:48]
▲ 강이숙 시인   

집 너머 호수공원 산책길에 매일 만나는 한 여인이 있다. 늘 분홍색 하의 차림이어서 쉽게 눈에 띄었다. 그것은 일반 평범한 바지가 아닌 레깅스였다. 남녀노소 수많은 이들이 북적대는 곳에서의 민망스런 차림에 심상치 않은 낌새가 느껴졌다. 그녀와 마주치는 날은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못 본 척 시선을 딴 데로 향하며 부리나케 그곳을 벗어나기 일쑤였다. 한번 눈이 마주쳤는데 살기 서린 눈빛에 놀라 허둥댔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은 무심한 척 그녀를 지나쳤지만 나는 예리하게 관찰하기에 이르렀다. 그녀와의 인연은 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처음 본 날이 연꽃지 물레방아 옆 초가정자에서였다. 호젓한 분위기가 좋아 많은 산책객들이 앞 다투어 쉬어가는 곳이다. 나도 그중 한사람이었다. 그날도 잠시 쉬어갈 요량으로 정자로 갔는데 낯선 그녀가 송두리째 점령해 있었다. 예의 그 분홍바지 입은 다리를 꼬고 우두커니 앉아 호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라 중얼거리기도 하고 히죽히죽 웃기도 했다. 그런 그녀가 정상인이 아니라는 판단을 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대체 누구일까? 어쩌다 이곳에 오게 된 걸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은 계속되었지만 거기까지였다. 안쓰럽고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눈치 채지 못하게 조금 먼발치에서 서성거리다 돌아왔다.


유년 시절 아픈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옆집 언니는 나를 끔찍이도 예뻐해 주었다. 우리 언니가 있었지만 친언니 이상으로 나에게 쏟는 열정은 대단했다. 그때 우리 언니는 아픈 엄마를 대신해 집안일이며 농사일까지 맡아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자연히 나는 관심 밖이었다. 마침 동생이 없었던 옆집 언니는 학교 갈 때는 업어다 주었고 맛있는 과자와 장난감, 인형들을 곧잘 사 주었다. 분홍 옷을 즐겨 입던 언니는 옷을 사면 꼭 내 것도 똑같은 색깔로 사 주었다. 새 옷을 입고 학교 가는 날은 날아갈 듯이 가벼웠다. 부러워하는 친구들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개선장군마냥 그들 사이를 헤집고 다녔다. 그러구러 지내던 어느 날, 언니 집에 키 크고 훤칠한 한 청년이 찾아 왔다. 그날 이후로 언니가 집을 비우는 일이 잦았다. 가끔씩 와서 며칠을 머물고는 한동안 보이질 않기를 반복했다. 생기를 잃은 나는 하릴없이 동네를 배회했다. 언니가 나타나길 고대했지만 들려온 소식은 곧 먼 곳으로 시집을 간다고 했다. 나는 슬펐지만 언니가 더 좋은 곳에 가서 행복하게 잘 살기를 빌었다. 명절 때 친정에 다니러 오는 언니가 낯설다 싶었는데 차츰차츰 발길이 뜸했다. 잠깐 마주치면 예전에 나를 예뻐해 주던 언니가 아니었다. 본듯 만듯하고 초점 흐린 눈으로 앞산을 응시하며 툇마루에 앉아 한나절을 보내곤 했다.

 

그런 언니가 무섭게 느껴져 집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이어 고등학교 진학과 함께 대처로 나오면서 언니의 존재를 까맣게 잊었다. 이듬해 여름방학을 맞아 집에 왔는데 어머니가 언니가 왔다 갔다고 했다. 화사한 분홍바지를 입고 하염없이 동네를 떠돌더라는 것이었다. 뭐라 두서없는 얘기 중에 귀를 세우고 들었더니 남편에게 빼앗긴 아기 이름만 애타게 부르고 또 부르더라고 했다. 물 한 잔이라도 먹일 셈으로 집으로 끌어들였는데 완강히 뿌리치고 홀연히 가버렸다고 했다. 심호흡을 하는 어머니 곁에서 속울음을 가슴에 둔탁한 통증이 밀려 왔다. 오늘 아침에는 커브 길을 도는데 저만치에 늘어진 수양버들 가지 사이로 분홍빛이 어른거린다. 오늘은 뭐라고 말을 걸어 볼까?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다정하게 무슨 말이라도 꼭 하고 싶은데…… 마른 침을 삼키며 절박한 심정으로 다가섰지만 그만 용기를 내지 못하고 지나치고 말았다. 그저 가련한 마음에 시린 냉기만 가슴팍으로 파고들었다. 언니가 그토록 꿈꾸던 핑크빛 꿈은 무엇이었을까? 지금 눈앞의 이 여인이 꾸는 꿈은 또 무엇일까? 어쩌면 아직도 두 사람은 미지의 아름다운 세계에 보이지 않는 고운 꿈을 좇아 또 다른 인생을 설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꿈은 꿈으로 끝날 수도 있지만 다시 예쁘게 피어날 수도 있는 것이다. 두 사람의 꿈이 새로이 환생해 찬란하게 피어나기를 소원해 본다. 뒤돌아서서 저만치 멀어져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응시한다. 추억 속 언니가 두 팔 벌려 내게로 달려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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