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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장미 마르는 시간
 
유서희 수필가   기사입력  2018/05/23 [19:22]
▲ 유서희수필가    

"이거 받아요."
오랜만에 만난 그가 흰 장미 다발을 내민다. 파랗게 물들인 안개꽃이 배경으로 피어있었다. 송이가 큰 흰 장미는 가슴에 안는 이에게 뿌듯함을 주었다. 꽃다발을 받아 본 지 까마득하다. 더구나 남자에게서 그렇게 큰 꽃다발을 받아본 적 없었기에 설렘은 감탄사를 연발했다. 이 남자 나를 좋아하나? 내심 기분이 더 좋아졌다. 그런데 흰 장미에 대한 탄성을 연신 내뱉는 나에게 그의 한마디는 나의 뒤통수를 내리쳤다."그거 학부형이 주는 건데 하소." 여자의 착각은 무죄인가. 터질 듯 팽창되었다가 한 순간 바람 빠지는 풍선이 되었다. 순간 돌아서고 싶었으나 꽃송이와 눈 맞추며 애써 마음을 눌렀다. 집으로 돌아 온 후 꽃다발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방으로 들어서니 불빛을 머금은 흰 장미가 드레스를 입고 결혼식장 입장을 기다리는 신부처럼 눈이 부셨다. 아무리 꽃을 좋아하는 여자지만 의미 없는 꽃다발에 감정은 건조해졌지만 그래도 꽃은 꽃이었다.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흰 장미가 먼지를 덮어 쓰고 시들어가도록 눕혀 두는 것은 꽃에 대한 예의가 아닌 듯 했다. 곡선이 예쁜 유리 항아리에 하나씩 하나씩 꽂았다. 다발로 묶여 있던 꽃을 항아리 속에 세워 놓고 보니 `예쁜 것은 어떻게 해도 다 예쁘다`는 말이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눕혀 놓아도 세워 놓아도, 곧게 세워도 비스듬히 세워도 그 나름의 미(美)가 돋보인다. 남자에게서 꽃다발을 받는 설렘을 바람 빠진 풍선이게 한 그가 원망스러웠지만 화병의 꽃을 보니 한 폭의 명화(名&)를 가진 듯 흡족하니 그를 용서하기로 했다. 흰 장미의 꽃말은 `순결, 존경`이라고 한다. 처음엔 꽃잎 떨어질 때까지 화병에 물을 담을까도 생각했지만 흰 장미를 바라보면 먹물 같은 마음도 순결해질까 하여 오랫동안 두고 보기로 했다. 하루 이틀……. 물기가 마를수록 줄기는 더욱 꼿꼿해지고 꽃송이는 점점 고개를 숙인다. 꽃잎은 순결의 흰색이다가 지금의 내 마음처럼 누렇게 변색된다. 배경이던 안개꽃은 선채로도 생화인지 건화(乾花)인지 구분이 되지 않게 말라가는데 수분 폭폭했던 흰 장미는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을 만큼 변해갔다. 생생하게 피어 있을 때는 보는 이의 마음까지도 흰색이게 할 듯 깊은 감성을 깨우더니 물기 말라 갈수록 누렇게 변색되어 갔다. 꽃잎이 말라가는 모습을 오랫동안 지켜 본 적이 없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보기 싫어져 버리곤 했는데 이번엔 그렇지가 않았다. 꽃잎이 말라갈수록 더 예뻐 보이는 것이다.


나이를 피부로 의식하게 되어서일까. 생기 잃어가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그 꽃 보며 느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꽃잎 말라가는 시간은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는 시간이다. 물기 품었을 땐 꽃의 모양과 색깔이 먼저 보이지만 말라 갈수록 앙상해진 꽃잎과 혈관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보인다. 그러나 그 모습이 보기 싫기 보다는 오히려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생의 모습 모두 비우고 고요해진 모습으로 고개 숙인 흰 장미의 모습 볼 때마다 숙연해진다. 마른 모습이라도 꽃이어서 예쁜 것이 아니라 속을 모두 비우고도 생의 자태를 곱게 간직하고 있는 장미의 깊은 향기가 전해지기 때문에 더욱 아름다워 보이는 것이다. 사람의 생도 흰 장미가 말라가는 모습과 다르지 않다. 누구나 젊고 활동적일 때는 예쁘고 향기 나는 꽃이다가 세월이 갈수록 고개를 숙인다. 예쁘고 수려한 외모를 가진 사람에게 우선 호감이 가지만 마음과 마음이 만나는 길은 내면이 아름다운 사람과의 만남이다.


 젊은 날을 어떻게 가꾸느냐에 따라 나이가 들었을 때의 모습도 달라진다. 탐욕과 욕심이 아니라 열정과 사랑으로 꽃 피우는 생이라면 나이가 들어서도 붉게 빛날 수 있을 것이다. 나이를 먹지 않는 사람은 없다.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간다`는 말처럼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내면을 붉게 가꾸어 간다면 지는 꽃도 저 흰 장미처럼 깊고 맑은 생의 향기를 뿜을 수 있을 것이다. 물기 하나 없어도 그림처럼 피어있는 흰 장미와 눈을 맞춘다. 고개 숙인 채 꽃잎의 혈관 하나하나 선연하게 드러나 있다. 활짝 피었던 꽃잎도 오므려들었다. 언뜻 보기엔 볼 품 없는 꽃 같지만 생의 모든 것 비우고 자유로운 영혼의 몸짓으로 피어나 있는 꽃잎 앞에서 가슴 뭉클해진다. 가만히 귀 기울이면 꽃잎의 말 속삭여 온다. "비우는 시간이 가장 아름답다고. 비울 줄 알아야 꽃처럼 다시 피어날 수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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