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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고한 서명上
 
진민 수필가   기사입력  2018/06/19 [20:27]
▲ 진민수필가     

이제는 더 이상 당신이 하셨던 말씀을 절대로 똑같이 하실 수도, 번복할 수도 없게 됐다.
그렇지만 당신의 명민함과 소탈함이 담긴 당신의 의지를 받들어 드릴 수 있게 된 하나의 실마리는 가슴이 아리도록 남아있음에야. 어머님께서 내 손을 꼭 잡고 말씀하신다. "어멈아, 나는 죽을 때 고생하고 싶지 않다. 밥숟가락 탁 놓자마자 자다가 그냥 죽는 게 최고여, 에이그 그러나저러나 고거시 쉬운 게 아니니께 걱정이지……"라며 말끝을 흐리신다.  TV에서 호스피스 병동이 나오는 장면과 함께 웰다잉을 주제로 하는 다큐를 보고 있는 중이었다. 한참을 심각하게 보시던 어머님께서 나도 저런 거 하나 써 놓을란다, 하시더니 삐뚤빼뚤하게 당신의 함자를 그리듯 적어놓으셨다.  결혼 이후 어머님께서 볼펜을 들고 직접 무언가를 쓰시는 모습을 본 게 그 게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물론 백지다.

 

당신은 백지 맨 아랫단에 사인이란 걸 했으니 나머지는 글 잘 쓰고 영리한 네가 문구를 작성해 잘 가지고 있다가 혹여 라도 당신께서 아무런 말씀도 할 수 없을 때, 떡하니 내놓아 증명을 하라신다.

염라대왕은 심술 맞아서 부를 때 한참을 고생시키다 가자고 하니까 일부러라도 곡기를 끊게 해서 미련 없이 데리고 가게끔 해야 한다고 농담을 하시면서도 의지가 대단하셨다.  선경지명이셨을까?! 요즘으로 치자면`연명포기각서`와도 같은 것이다.  그 때는 시어머님께서 서슬이 시퍼런 때라 감히 말대꾸는커녕 딴청을 피우기조차 송구스러워서 빈 란에 서명이 이루어진 그 용지를 시키시는 대로 봉투에 담아 서랍에 넣어두었다. 벌써 십 오륙년도 더 된 일이라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3년 전부터 어머님께서 하반신을 못 쓰게 되시고 내가 많이 아팠던 관계로 별 수 없이 노인병원에 모시고 갈 때 장롱을 정리하면서 A4 용지 위에 덩그러니 어머님의 함자만 사인 된 봉투를 발견했더랬다. 


병상에서 어머님은 남다른 총기와 삶에 대한 의지가 대단하셔서 한동안 반쯤 앉은 채로 보조보행기를 의지해서 걷는 연습도 하시고 무엇이든 열심히 드셨지만 93세에 접어들어서는 기력도 많이 쇠하시고 치매증상이 서서히 오고 있었다. 주말마다 병원에 가면 어머님께서는 늘 내 손을 꼭 쥐고서 당신 아들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시며 늙으면 곱게 죽어야 하는데 빨라 죽지도 않고 너희들 고생과 걱정만 시킨다고 혀를 끌끌 차신다. 그리고는 일 분도 채 안 돼, 눈을 크게 치켜뜨시고는 내가 얼른 자리 털고 일어나려면 잘 먹어야 한다면서 옆 침대의 노인이 드시고 기운 차린다는 보신탕을 사오라고 이르신다.  전에도 할 수 없이 몇 차례 사다드리긴 했지만 드시고 나면 설사를 하시고 몸에 반점이 생길 정도로 체력이 약해져서 체내에 안 받는데도 당신 뜻을 거역하기 힘들어 보신탕이라고 잠시 둘러대고 순대국을 준비하면 그런대로 잘 드셨는데 최근에는 그마저도 찾지 않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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