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시간을 견디는 법 또 하나
 
김명숙 시인   기사입력  2018/07/10 [20:09]
▲ 김명숙시인    

나는 걷는 것을 즐긴다. 걷기는 나를 위한 잠깐의 쉼표이자 또 다른 출발을 위한 심호흡이다. 여기가 아니라 저기를 가고 싶다는 욕망을 오직 두 다리만으로 만난다. 걷는 동안 나에 대하여, 나와 타인과의 관계에 대하여 질문하고 뜻하지 않은 수많은 질문들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보게 된다.

 

내 안에 웅크리고 있는 타인을 쫓아내고 나 자신만을 채우며 걷다보면 몸속에 간직된 주름이 조금씩 펴지는 것을 느낀다. 성급하고 초조하게 나를 압박하며 생활을 헝클어놓는 온갖 근심걱정들이 잠시 멈추는 것을 본다. 걷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산티아고 걷기`라는 소망 하나쯤 갖고 있을 것이다. 프랑스 생장에서 시작하여 스페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이르는 800여km의 길. 수만 명의 사람들이 해마다 그 길을 걷고 있는데 그중에서 한국 사람이 차지하는 순위가 6위라고 한다.

 

우리나라가 기독교 문명권도 아닌데다 수천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스페인과의 거리를 생각하면 대단한 일이다. 기독교 문명권에서는 죽기 전에 꼭 한번 성지를 다녀와야 한다는 믿음이 있다고 한다. 최고의 성지인 예루살렘은 유럽에서 약 4,300킬로미터나 떨어진데다 7세기부터는 이슬람 영역이었으니 그곳까지의 순례는 목숨을 담보로 하는 길이었다.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는 예수의 제자인 야고보 성인의 유골이 발견된 곳이다. 가까운 순례지를 원했던 사람들은 대안으로 이곳을 성지로 믿고 순례길에 올랐다고 한다.

 

오고가는 많은 사람들의 발자국이 모여 길이 생기고, 길목마다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성당이 세워졌다. 경쟁하듯이 우뚝 선 로마네스크 양식의 풍부하고 아름다운 건축물이 길 가는 사람들의 기도처이자 안식처가 되어주었다. 이 길이 산티아고 길이다. 기독교를 믿지 않는 내겐 전혀 상관없는 길인데 왜 그렇게나 열광했는지 이유는 잘 모르겠다. 허영이었는지 버킷리스트 1번으로 자리를 차지한 산티아고 걷기. 노트 속에 숨겨놓고 그곳을 다녀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길의 모습을 지도로 상상하며, 성당의 모습을 보며, 그 역사를 읽으면서 꿈을 키웠다. 시간이 나면 가리라, 여유가 되면 가리라, 내년에는 꼭 가야지. 그러기를 10년. 시간 없음이, 용기 없음이, 나빠진 건강이, 언어에 대한 두려움이... 내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친하게 지내는 누군가 산티아고로 훌쩍 떠났다. 물론 오랫동안 결심하고 준비하고 생각한 떠남이었겠지만 내게는 충격이었다. 격한 슬픔과 분노의 감정이 찾아들면서 부정적인 감정이 나를 휘감았다. 허튼 시기심과 선망의 감정이 종내는 자기혐오에 빠지게 했다. 나를 찾기 위해 세상의 끝으로 간다는 말이 약간의 유명세와 허세를 위해 꾸역꾸역 걸을 것이라는 의심마저 들게 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이 실패하길 바라고 그들의 실수에 대해 험담하길 즐기는 건 결국 무척이나 슬픈 이유 때문이다. 주목받지 못해 화가 나 있고, 그래서 우리 몫을 빼앗아간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단죄함으로써 위안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알랭 드 보통의 이 글이 도끼날이 되어 날 내리쳤다. 이것이었구나, 이런 것이었구나 싶었다. 부끄러움으로 쟁여진 허망한 환상과 콤플렉스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주말이면 해파랑 길을 걷는다. 부산 오륙도 광장에서 시작하여 동해안을 따라 770Km를 걸어 통일전망대에 이르는 길. 50구간으로 나누어 곳곳에서 스탬프를 찍으면서 갈 수 있도록 돼 있다. 산티아고 길처럼 단번에 걸어야 된다는 압박감 없이 한 번에 한 코스씩, 혹은 두 코스 해서 50/50을 채워가는 중이다. 바람 시원한 정자를 만나면 책도 꺼내 읽고, 풍광 좋은 곳에선 커피도 마시며 천천히 걷는다.

 

그러면 마을 이름, 굽이도는 모퉁이 이름, 산 이름, 강 이름들이 흘러들어와 곁에 머물면서 제각기 다른 결을 보이며 말과 서사가 된다. 스탬프 북의 모든 칸에 도장이 다 찍히면 활짝 웃으며 사진 한 장 찍고 다시 걸을 곳을 생각할 것이다. 걷는 사람은 숨을 가다듬으며 시간을 길들이면서 다른 세계로 떠난다. 걷는다는 것은 지금의 시간과 공간을 잠시 동안 혹은 오랫동안 자신의 몸으로 살게 한다. 나는 오늘도 길 위에 새겨진 많은 이야기를 발로 읽으면서 시간을 견딘다.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톡
기사입력: 2018/07/10 [20:09]   ⓒ 울산광역매일
 
롯데백화점 울산점 https://www.lotteshopping.com/store/main?cstrCd=0015
울산공항 https://www.airport.co.kr/ulsan/
울산광역시 교육청 www.use.go.kr/
울산광역시 남구청 www.ulsannamgu.go.kr/
울산광역시 동구청 www.donggu.ulsan.kr/
울산광역시 북구청 www.bukgu.ulsan.kr/
울산광역시청 www.ulsan.go.kr
울산지방 경찰청 http://www.uspolice.go.kr/
울산해양경찰서 https://www.kcg.go.kr/ulsancgs/main.do
울주군청 www.ulju.ulsan.kr/
현대백화점 울산점 https://www.ehyundai.com/newPortal/DP/DP000000_V.do?branchCd=B00129000
  • 도배방지 이미지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