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 간이역에 내렸다 날이 끄무레하여 바삐 플랫폼을 빠져나오는데 웃음소리가 들렸다 벤치에 앉은 두 사람 눈이 감긴 활짝 웃는 이순구 화가의 웃는 얼굴 그림처럼 노란 목젖 드러내고 하얗게 웃는 민들레처럼
둘은 눈을 감고 있다 생전 떠본 적 없던 것처럼 웃음을 꼬옥 붙잡고 있다
어느 산골 간이역에서 만나는 사랑이 있다. 한 달에 한 번 그 곳에서 만나고 헤어지는 사랑은 생전 눈을 떠본 적 없는 시각장애인이다. 사랑은 어떤 난관이라도 초월하는 지상의 가장 뜨거운 아름다움이 아닌가. 사물이 어렴풋하게나마 보이는 남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여자를 위해 먼저 와서 기다려 마중하고, 몇 시간 후 돌아가는 기차에 여자를 배웅하고 홀로 떠나는, 쇠귀 선생의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을 너머 `가슴에서 발까지의 여행(실천적인 삶)`을 몇 년째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대물림 하지 않기 위해 결혼을 하지 않겠다는 둘은, 손을 잡고 무슨 즐거운 이야기를 하는지 이순구 화가의 <웃는 얼굴>처럼 함박꽃이다. 날이 끄무레하여 비가 올까 서두르는데, 그들에게 날씨 따위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듯 미동도 없다. 사랑은 늘 아득했고, 영원을 약속하기에 사랑은 얼마나 흔들렸던가. 눈빛을 바라보지 않고는 그 사랑을 믿지 못하고, 짧은 만남의 아쉬움은 자주 이별을 꿈꾸게 하지 않았던가. 검정 비닐봉지에 든 물 한 병과 과자 한 봉지로 사랑의 가치를 따져보는 비장애인이라는 우리는, 허름한 나무 벤치에 앉은 사랑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할 것인가. 나는 혹여 사랑을 앞에 두고 사랑을 찾아 헤매는 청맹과니는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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