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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밥의 김
 
최영주   기사입력  2018/08/23 [18:12]
▲ 최영주수필가    

김밥을 먹을 때면 가끔 상상하곤 한다. 김밥 입장에서 보면 김은 모든 재료를 감싸고 있다. 자신은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는 천혜의 능력이 있어 어느 곳에서나 무엇을 하든 능력 발휘를 하며 대우를 받는다. 하등 아쉬울 것 없으면서도 잠재력 좋은 친구를 설득하고 그저 그렇고 그렇게 흩어져 있는 친구들을 불러 함께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나 인정을 받고 있다. 돋보이는 실력에다 마음마저 넉넉하고 슬기로운 사람. 김밥의 김이 그런 사람 같다. 자신과 뜻이 잘 맞고 친하여 자주 어울리는 사이지만 워낙 높은 가치로 각광받는 위치에 있어 흔전한 밥한테 김은 몸을 기울여 설복했을 것이다.

 

그런 뒤 단무지와 어묵과 시금치를 데려왔으리라. 김밥 시대 초기에는 달걀이 대단히 지체 높은 존재여서 달걀은 특별초빙 했을 성 싶다. 맛과 영양 면을 높이며 자리를 좀 빛내 달라고 부탁했을 것 같다. 단무지와 어묵은 흔히 학생들 도시락 반찬에나 들어가는 처지였다. 시금치나물은 아이들이 잘 먹지 않으려고 해 밥상에 무료하게 앉아 있다 찬장과 밥상을 오락가락하는 신세로 전락되기도 했다. 모두들 그다지 찾는 데가 많지 않아 존재감 낮게 서성이는 사정이었다.

 

그러다 김을 만나 새롭게 태어났다. 김은 불러 모은 친구들한테 기꺼이 밑받침이 되어 준다. 맨 겉의 거죽이 되기를 자처해 가장 밑바닥에서 온 몸을 펼친다. 그리곤 저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줄 알고 있는 밥을 향해 몸에 소금과 참기름을 발라 밑간을 해 오라고 충고한 뒤 제 위에 엎드리라고 권한다. 거기에다 별 볼일 없는 일상을 보내고 있던 단무지며 어묵, 시금치를 정답게 어깨동무시킨다.
혼자서 조리도 필요 없이 날달걀인 채로 밥 한 그릇을 간단하게 달걀비빔밥으로 만들어버리는 힘과 위세로 잘난 척하며 툭하면 깨지고 성질을 부리는 달걀더러, 단무지들과 어울려 어깨를 겯는 법을 배우게 한다. 그렇게 어우러지게 해놓곤 김은 온 힘을 다해 친구들을 감싸 김밥으로 승격해 낸다.


`김밥 옆구리 터지는 소리`는 상대를 조롱할 때 쓰는 말이다. 악의 없는 선의의 농담이지만 비아냥거림이 들어 있다. `김밥이 터졌다`고 할 때 우리는 앞뒤 생각 없이 김이 찢어졌다는 뜻으로 말한다. 밥 양이 필요 이상 많거나 단무지나 시금치의 물기가 덜 제거되었거나 김밥을 써는 칼질이 서툴러서 그리 된 것을 김이 몽땅 뒤집어쓰는 것이다. 그러고도 김은 아무렇지 않은 듯 묵묵하다. 

  
어릴 적 소풍날 아침 어머니가 김밥을 싸고 계시면 더없이 행복하고 신이 났다. 어머니 옆에 붙어 서서 김밥을 썰고 나오는 꽁다리를 집어먹는 맛은 비할 데가 없었다. 초등학교 3학년 봄 소풍날에도 점심시간에 큰 광주리를 맨 넝마장수들이 밥을 얻으러 왔다. 한국전쟁 후인 그 시절엔 십대 넝마장수도 많았다. 그날도 열예닐곱 살쯤의 넝마주이 네댓이 와서 내미는 깡통에 김밥을 하나씩 넣어 주었다. 얼마 후 또 한 넝마주이가 홀로 다가와서 말없이 깡통을 내밀었다.

 

뜻밖에도 흰 얼굴에 파란 눈의 혼혈아 소년이었다. 넝마주이들은 대부분 여럿이 몰려다니는데 그 소년은 남다른 외모인 탓으로 친구도 없이 혼자 다니는 것 같았다. 땟국 흐르는 옷에 넝마광주리를 매고 긴 집게를 들고 있었지만 깎아 놓은 듯 예쁜 얼굴이어서 몹시 낯설었다.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도 소년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보석 같은 파란 눈이 한없이 투명해서였을까. 짠한 마음이 더욱 짙게 들었다. 특별히 김밥 세 개를 깡통에 넣었다. 맨밥이 아니고 맛있는 김밥이어서 은근히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넝마주이나 거지들한테 김밥을 한 개씩만 주고 있노라면 많이 미안했다. 하나씩만 주는데도 도시락 속의 김밥이 확 줄어들어버리므로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만큼 그들은 김밥을 좋아했다. 김밥은 먹기에도 편하고 다른 사람과 나누어 먹기도 편리해서 좋다. 김밥을 먹고 있으면 단무지며 어묵과 시금치가 제 나름 똑똑하게 개성을 살려내어 또렷한 맛을 내고 있다. 각자가 지닌 가치가 한껏 발휘되고 있다. 꺾이거나 희석되지 않으면서도 잘 조화된 어울림이다. 그 모든 것을 자꾸 김밥의 김이 해낸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나는 늘 내 앞가림하기에만 급급해하며 살아간다.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 있을 김밥의 김 같은 사람들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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