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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방 일기(日記) <두레문학 작가상>
 
김완수 시인   기사입력  2018/11/07 [20:10]

 반지하의 링으로 나앉은 방엔
시커먼 밧줄이 드리워져 있었다
외딸고 축축한 기운을 먹어
독을 품은 밧줄은
남자의 머리 위에서 입을 벌리고 있었다
차가운 방구들에 알을 품은 그림자도
입김을 받아먹으며 자리를 넓혔다
그림자가 금방이라도 밧줄을 잡아당길 것 같은 밤
남자는 웅크려 시간을 끊듯 눈 질끈 감았다

 

남자는 그림자와 친숙했다
방바닥에 들러붙은 알주머니를 긁어내면
그새 다 자란 벌레는
눈앞에 비문(飛蚊)처럼 떠다니다가
남자가 눈을 감으면
가슴팍까지 파고들어 알을 깠다

 

밤낮없이 링 안에서
보이지 않는 외로움과 싸우던 남자가
백지(白紙)를 채우며 빛을 찾을 때
코앞까지 손 뻗치다가 주춤하는 밧줄

 

남자가 더 이상 눈을 뜨지 못하던 아침
방에선 배 잔뜩 부른 밧줄이 발견되었다
밧줄은 악취를 탈피한 채
식은 몸뚱이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남자가 홀로 싸워 온 링이 밖으로 열리고서야


사람들의 이목은 방 안을 비집으며 들어왔고
밧줄은 또 다른 그림자를 키우려
들창 밖으로 빠져나갔다

 

이제 아무도 없는 텅 빈 링
사람들의 이목을 따라 들어와
방 구석구석 쓸쓸히 순례하던 한 줄기 햇살이
뒤늦게 일기장에서 몸부림의 기록을 찾아냈다

 


 

 

▲ 김완수 시인    

세상이 날로 흉흉해져서일까. 고독사는 이제 우리에게 그리 놀랍지 않은 일이 됐다. 그러나 거꾸로 얘기하면 남의 일 같았던 고독사가 내 주변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 됐다는 뜻이기도 하리라. 일 인 가구 시대를 사는 지금은 죽음이 마치 항상 내 집을 기웃거리는 것 같기도 하다. 종교가 아무리 인간에게서 죽음의 어둡고 무거운 면을 덜어 내 준다 해도 우리는 그 그림자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죽음은 경험할 수 없기에 우리가 죽음 앞에서 막연한 공포심을 갖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더군다나 죽음을 외롭게 맞이할 때의 공포심이야 오죽하랴. `웰 다잉(Well-Dying)`이라는 말이 있듯 평온한 죽음을 바라는 건 사람의 본능이다. 그럼에도 죽음이 피할 수 없는 삶의 마침표라면 겸허히 맞이하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리라. 또 굳이 종교의 역할을 말하지 않더라도 죽음을 삶의 연장선으로 바라보는 지혜도 필요할 것이다. 고령화 사회를 살고 있다고는 하나 죽음은 우리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고 불시에 찾아오기 마련이다. 고독사를 더 이상 쪽방촌이나 원룸촌의 일부 지난한 사람들 문제로 떠넘기지 않고 함께 고민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삶을 성찰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설령 불편한 일이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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