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지붕 없는 미술관`으로 알려진 남구 장생포 신화마을에는 담벼락마다 그림이 그려져 있다. 벽화마을로 제법 유명세를 타고 있는 이곳은 현재 석유화학공단과 마을의 접경지로 남아있다. 그 경계선 조금 아래 여천오거리 인근 부두 가는 길 초입 `만수 밭에`살았던 필자의 동네는 개발지역이어서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필자가 어릴 때 부두 근로자로 하역을 맡았던 아버지의 하루치 노동은 피곤한 작업이었다. 아버지의 자전거는 일을 끝내고 퇴근하는 주인의 비틀거리는 몸무게를 지탱하면서 매일 집 앞에 도착하곤 했다. 형이 자전거를 받아 세워두고 누나가 퇴근한 아버지의 도시락이 든 가방을 받아들면 필자는 노동에 지쳐 새까매진 아버지의 발을 세숫대야의 물로 씻겨드리곤 했다.
어느 날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온 가족이 가족사진을 찍었는데 그 사진을 찍었던 추억사진관도 진즉에 이전해 헐리고 사라졌다. 술을 좋아하며 즐겼던 아버지는 사진을 참 많이 찍었다. 까만 선글라스를 끼고 멋을 부리며 찍은 사진부터 회사 사람들과 야유회에서 찍은 사진 등 많은 아버지의 사진들이 어느 날 어머니의 손에 의해 불살라졌다.
자식들 뒷바라지와 남편 수발에다 회사에 다니며 맞벌이를 해야 하는 어머니에게 사진 찍는 행동은 값비싼 사치로 비춰졌기 때문일까. 아니면 어머니와 단란하게 찍은 사진 한 장 없는 현실이 못 마땅해서일까. 지금 생각하면 그 사진들은 소중한 추억의 편린들이며 우리 가족사를 담은 그리움의 기억저장소인데 더 이상 찾을 수 없으니 허망하다. 그 사진들이 남아있다면 회고록에 버금가는 멋진 작품이 될 텐데 고인이 잊혀져가듯 잊혀 가고 있다.
아버지는 자신의 노동으로는 가족부양의 막중한 책임을 다 할 수 없다고 여겨 술에 의지하고 폭음을 즐겼을까. 그저 취하고 싶었을 따름인데 마시다보니 폭음이 됐던 걸까. 음주량의 대소경중을 떠나 술 마시는 시간이 아버지에게 일정 수준의 현실도피는 됐음직하다. 그런 아버지에게 다른 미래 희망처가 있었다는 것은 신기한 사실이다. 아버지는 매주 한 번도 빠짐없이 복권을 구입했다. 필자도 지금 중년을 지나는 나이가 되니 아버지의 힘겨움을 체득하게 된다. 아버지의 복권은 일확천금을 노리며 과녁을 명중시키는 화살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저 소시민이 마음속으로 몰래 꿈꾸는 무지개 혹은 성취되지 않아도 나무라지 않을 한 주간의 즐거움 정도였을 것이다.
술 한 잔 덜 먹었다 생각하고 간절한 기대감을 가지고 구입했던 복권은 아버지에게 당첨의 기쁨을 선사하지 않았다. 가난한 시절 아버지의 복권이 당첨되진 않았지만 되돌아보면 가장 큰 복권은 아버지가 남긴 가족들이며, 가족들이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이루어내는 가화만사성이 가장 큰 축복이 아닐까 싶다. 아버지가 지금 살아계신다면 그 연유를 물어볼 수 있을 텐데 부친은 비교적 장수한 형제들에 비해 일찍 돌아가셨다.
환갑 한 해 전에 돌아가셨으니 요즘으로 치면 단명했던 셈이다. 대신 큰 누나에게 물어 지난 시절의 일들을 소환해내면 과거의 퍼즐이 정확한 그림으로 선연히 드러날지도 모르지만 이런 일들을 과거의 것으로 그냥 흘려보내도 무방할 만큼 필자도 느슨해졌다. 아버지의 복권이 당첨되지 않은 것보다 아버지의 옛 모습이 담긴 사진 한 장이 더 아쉬운 과거로의 추억여행에 그나마 안식을 얻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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