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비 오는 날의 수채화
 
유서희 수필가   기사입력  2019/04/21 [17:52]
▲ 유서희 수필가    

음식 복이 넝쿨째 굴러 왔다. 연일 임금님의 수라상이 부럽지 않은 밥상으로 켜켜이 쌓인 꽃잎 위에 누운 것 같은 몽환적인 나날이다. K여사님을 만난 건 얼마 전 어느 행사에서였다.

 

행사가 끝날 즈음 관객들에게 행사 참여에 대한 소감을 묻는 진행자의 말에 한 남성이 걸어 나가더니 관람을 하러 온 사연을 말했다. 못난 자신을 위해 평생 고생만 하시다가 연로해진 어머니는 얼마 전 하시던 일을 그만 두셨다.

 

시간이 여유로워지자 습관적으로 종이에 글을 적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하루는 그 아들이 무슨 글을 쓰시나 하고 읽어 보았다. 아들은 깜짝 놀랐다. 우리 어머니가 이렇게 글을 잘 쓰셨나 하여 그 글들이 진짜 어머니가 쓴 글이 맞는지 물어 볼 정도였다. 그 후, 아들은 일흔 넷의 어머니에게도 자서전을 내고 싶어 하는 꿈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그 꿈을 이루어 드려야겠다고 결심했다. 마침 울산문인협회 회장님이 출연한다는 행사의 홍보를 보고 무작정 어머니를 모시고 오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꿈이 있는 사람은 늙지 않는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연세에 비해 훨씬 동안으로 보이는 K여사께 응원을 해 드리고 싶어 먼저 그녀에게 다가가 인사를 드렸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끝에 같은 북구에 살고 있다는 말에 더욱 반가웠다. 다음날 아침, 휴대폰을 열어 보니 모르는 번호의 전화가 2통이 와 있었다. 연이어 전화가 와 있는 걸 보니 급한 전화인 것 같아 전화를 걸었다. 어제 만났던 K여사님이었다. 늙은 자신을 친절하게 대해 준 것이 고마워서 음식을 갖다 주고 싶다고 하셨다. 그 분이 사는 곳과 나의 직장까지는 도보로 1시간여 걸린다. 마음만으로도 충분하다며 사양을 하였으나 퇴근시간에 맞추어 근무지로 오시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시간에 맞추어 약속 장소로 나가니 안개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K여사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전화를 드리니 도로 건너편에 서 계신다고 했다. 통화가 끝나자  창이 넓은 모자를 쓰고 시장캐리어를 힘겹게 끌며 빗속을 걸어오시는 분이 눈에 들어 왔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그만 말문이 막혔다. 단지 다정하게 대해 주었다는 이유로 일흔이 넘은 분이 비를 맞으며 짐 캐리어를 끌고 한 시간이나 오로지 나 한사람을 위해 준비 해 시다니. 감동이 일어 나의 심장은 요동을 쳤다.


연둣잎의 색싹과 연산홍이 붉게 피어있는 풍경 위로 안개비가 자욱하게 펼쳐져 있는 거리를 걸어오시는 모습은 그 어떤 명작보다도 아름다운 한 폭의 수채화였다. 굴곡진 생의 골짜기를 지나 온 한 사람의 일생이 내게로 걸어오는 모습을 보고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안절부절 했다. 초록 신호등을 기다며 구부렸던 허리를 펴다가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드셨다.

 

K여사님은 초록불로 바뀔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시고 아직 빨간 신호등인데도 차가 오지 않자 뛰다시피 하며 캐리어를 끌고 건너 오셨다. 서로 알게 된 지 불과 며칠 밖에 되지 않았는데 마치 오랫동안 알아 왔던 사람처럼 반가움에 일초라도 빨리 만나고 싶은 마음은 나도 같았다. 몇 걸음 앞서 건널목으로 마중을 가자 이산가족 상봉하듯 서로를 껴안으며 반가움을 나누었다. 그 순간 친청 엄마가 살아오신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드는 것 같았다.

 

그런데 캐리어를 여는 순간 또 한 번 눈이 휘둥그레졌다. 두 손으로 둥글게 뭉친 커다란 쑥 덩어리가 9개, 1,5L 페트병에 한 가득 담은 감주와 어린 엄나무 잎 장아찌를 캐리어 가득 담아 오신 것이다. 바로 옆에 있는 차로 음식을 옮기는 것도 꽤나 무거웠는데 그 먼 거리를 힘겹게 가지고 오신 것을 생각하면 감동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드라마에서 보았음직한 이런 일이 나에게 지금 일어나고 있다니. 몇 번이나 이게 꿈은 아닌지 눈을 깜빡거려 보았다.


나도 모르게 `친정어머니도 그러지 못 하실 것 같았다`는 말이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그 말을 듣고 `그러면 친정엄마 하지 뭐` 하시며 호탕하게 웃으신다. 비닐 속에선 장아찌 국물이 쏟아져 차 안은 위를 긁는 냄새가 진동을 했지만 나는 행복한 비명을 질렀다. 그 뒤로도 연이어 아침부터 하루 내내 잡채와 꽃잎김밥, 부침개등 갖가지 음식을 해 놓고 퇴근시간을 기다려 나에게 지수성찬 밥상을 차려 주시곤 하신다.

 

봄 처녀의 마음 같은 변덕스러운 바람에 복사꽃잎이 사방으로 흩날려 분홍빛으로 풍경이 물들고 있다. 이 봄날 나는 무슨 복이 많아 이리도 행복에 겨울까. K여사님이 전해 주신 감동을 생각하면 울컥울컥 눈물 솟구치는 순간이 잦다. K여사를 닮아 나도 누군가에게 분홍빛 풍경이 되어 비오는 날의 수채화 같은 그림을 그려내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마음 모은다.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톡
기사입력: 2019/04/21 [17:52]   ⓒ 울산광역매일
 
롯데백화점 울산점 https://www.lotteshopping.com/store/main?cstrCd=0015
울산공항 https://www.airport.co.kr/ulsan/
울산광역시 교육청 www.use.go.kr/
울산광역시 남구청 www.ulsannamgu.go.kr/
울산광역시 동구청 www.donggu.ulsan.kr/
울산광역시 북구청 www.bukgu.ulsan.kr/
울산광역시청 www.ulsan.go.kr
울산지방 경찰청 http://www.uspolice.go.kr/
울산해양경찰서 https://www.kcg.go.kr/ulsancgs/main.do
울주군청 www.ulju.ulsan.kr/
현대백화점 울산점 https://www.ehyundai.com/newPortal/DP/DP000000_V.do?branchCd=B00129000
  • 도배방지 이미지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