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실학자인 이덕무는 최세진, 주시경과 마찬가지로 살아생전 훈민정음 해례본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런 `뇌피셜` 상태에서 그는 훈민정음과 관련하여 `청장관전서` 제54권에서 그 당시의 소문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바에 의하면, 세종 장헌대왕이 일찍이 왕의 변소에서 측주(厠籌: 용변을 보고난 뒤 사용하는 대나무로 만든 박편)를 배열해보다가 홀연히 깨닫고 성삼문 등에게 명하여 창제하였다고 한다.
"이 설은 `창틀` 설로 변화돼 일본인들에게까지 전해져 일제 치하 시엔 "세종이 창살과 문고리를 보고 한글을 만들었다"는 설이 파다했다. 오늘날 많은 국어학자들은 훈민정음 해례본 발견 이후 그 이전에 제기됐던 모든 억측들이 깨끗이 정리됐다고 말한다. 하지만 일부분만 불식됐을 뿐, 훈민정음 관련 억설들 중 상당수는 여전히 정리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그 대표적인 예 중 하나가 제주도에만 속칭 `아래아(ㆍ)`의 원음이 보존돼있다는 설이다.
제주특별자치도가 2017년 발행한 `개정증보 제주어사전`에서는 `해변, 해녀`는 `해벤, 해녀`로, 해녀의 동의어인 `잠녀(潛女)`는 훈민정음 1번 중성자를 써서 `ㅈㆍㅁ녜`라 기록하였다. 전통적으로 제주도에서는 `잠녀`를 `좀녀` 또는 `좀녜`라고 발음해왔다. 그 같은 예들에서처럼, `ㆍ`에 대한 제주도 발음은 [ɒ] 또는 [ɔ]로 후설원순(後舌圓脣) 모음이다. `원순`은 발음할 때에 둥글게 오므리는 입술을 뜻한다. 그렇다면 이 제주도의 `후설원순` 소리가 훈민정음의 원음인지 아닌지를 훈민정음 해례본으로써 가려낼 수 있을까? 당연히 있다.
훈민정음해례 5장에서는 중성 `ㆍ ㅗ, ㅏ, ㅜ, ㅡ, ㅓ` 등에 대해 `개구도(開口度: 발음 시 입을 벌리는 정도)`와 `입술의 오므려짐 여부` 두 가지 사항을 기준으로 하여 두 글자씩 상호 비교를 통해 그 차이점을 설명해놓았다. "①ㅗ與ㆍ同而口蹙, ②ㅏ與ㆍ同而口張, ③ㅜ與ㅡ同而口蹙, ④ㅓ與ㅡ同而口張" 부분이 바로 그것이다. 이 문장들에서의 접속사 `而(이)`는 순접이 아니라 역접의 의미로 쓰였다. 번역 시 주의할 점은, 위 네 문구를 반드시 함께 전체적으로 고찰해야 한다는 것이다. 먼저 축자식 단순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①ㅗ는 ㆍ와 같지만 입이 오므라진다. ②ㅏ는 ㆍ와 같지만 입이 열린다^벌어진다. ③ㅜ는 ㅡ와 같지만 입이 오므라진다. ④ㅓ는 ㅡ와 같지만 입이 벌어진다.
이를 언급된 사항인 `개구도`와 `원순 여부`를 기준으로 생략사항들을 추출하여 정밀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①ㅗ는 ㆍ와 같은 반폐음(半閉音)이나 입을 오므리는 것이 다르다. 즉, ㅗ는 원순음이고 ㆍ는 평순음이다. ②ㅏ는 ㆍ와 같은 평순음이나 ㆍ에 비해 입이 더 벌어지는 개음(開音)이다.
③ㅜ는 ㅡ와 같은 폐음(閉音)이나 입을 오므리는 것이 다르다. 즉, ㅜ는 원순음이고 ㅡ는 평순음이다. ④ㅓ는 ㅡ와 같은 평순음이나 ㅡ에 비해 입이 더 벌어지는 반개음(半開音)이다. 훈민정음 해례본의 설명에서 빠진 사항은 다음과 같다. ⑤ㅏ與ㅓ同而口張: ㅏ는 ㅓ와 같은 평순음이나 ㅓ보다 입이 더 벌어진다. ㅏ는 `개음`이고 ㅓ는 `반개음`이다. ⑥ㅓ與ㆍ同而口張: ㅓ는 ㆍ와 같은 평순음이나 ㆍ에 비해 입이 더 벌어진다. ㆍ는 `반폐음`이다.
이상에서와 같이, 훈민정음 제1번 중성인 `ㆍ`는 입을 오므리지 않는 `평순음`이다. 그러나 제주도 방언에서의 해당 발음은 입을 오므리는 `원순음`이니 제주도 `아래아` 설은 오해임이 판명된다. `ㆍ`를 `ㅗ` 소리로 발음하면 `ㆍ`가 들어간 `ㆎ`도 `외`로 발음해야 일관성이 있다. 그러나 제주도 방언에선 정음이 `ㅎㆎ`인 `해(海)`를 `회`가 아닌 `해`로 발음하니 여러 면에서 억설임이 증명된다. 물론, 제주도에도 다른 곳들처럼 `ㆍ`의 본음이 확실히 남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