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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국가(1)
 
박상훈 국회미래연구원 연구위원   기사입력  2019/05/23 [17:59]
▲ 박상훈 국회미래연구원 연구위원    

정치 고전이란 가장 오래된 미래이자 가장 오래갈 미래라는 말이 있다. 보통은 500년 이상 읽혀 온 책을 고전이라 하는데 거기에는 과거나 지금, 미래에도 인간 사회가 직면하게 될 `영원한 문제`에 대한 깊은 통찰이 담겨 있다는 의미겠다.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정치사상을 가르치는 앨런 라이언은 자신과 같은 학자를 가리켜 평생 20권도 안 되는 정치 고전에 집착하는 직업인이라 풍자한다. 향후 500년 뒤에도 그 책들은 여전히 읽힐 텐데 그 가운데 누구라도 첫 번째로 꼽는 책은 2500년 전에 출간된 플라톤의 `국가`다. 

 

미국 예일대의 정치사상 분야를 대표하는 스티븐 스미스는 플라톤의 `국가`를 가리켜 "모든 것이 시작된 책"이라 말한다. 이 말을 이해하려면 제목부터 다시 봐야 한다. 원제는 그리스 말로 폴리테이아(Politeia)이다. 국가 말고도 정체(政體) 내지 국체(國體)라고도 번역되는 이 개념이 중요한 것은 정치를 하나의 건축학적이고 조형적인 구조로 보았기 때문이다. 


누가 설계자고 누가 시공자일까? 인간이다. 우리가 어떤 지식을 갖느냐에 따라 폴리테이아를 좋게 설계할 수 있고 그 속에서 개개인의 시민들이 좀 더 좋은 삶을 살게 만들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신화와 자연철학이 지배하던 당시로서는 이런 발상이 놀랍도록 혁명적이었다. 신의 변덕과 폭력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던 인간이 정치의 방법으로 체제나 구조를 조형해 스스로의 운명을 만들어갈 수 있다는 선언에 가까웠다.

 

초인적 섭리나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자연에 순응하기보다는 이를 통제하고 선용할 수 있다는 대담한 발상도 가능케 했다. 정치가 신과 자연을 대신해 `질서의 창조자`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관념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지금으로부터 200년도 훨씬 전에 미국의 연방 헌법을 준비하면서 알렉산더 해밀턴은 "훌륭한 체제, 훌륭한 정부를 만들 능력이 있는 사회인가 아니면 운과 무력에 영원히 의존하도록 운명 지어진 사회인가"를 자문한 적이 있는데 이런 접근이야말로 플라톤적이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정치가 분야별 정책을 통해 경제와 사회 질서는 물론 교육과 복지, 교통과 생태 환경적 질서에 이르기까지 공동체 전체의 질서를 만들고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이 모든 것은 플라톤의 `국가`에서 비롯된 것이다. 플라톤이 개개인 삶과는 무관하게 정치의 구조나 체계를 만들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시민들이 살아가게 될 삶의 양식(way of life)에 폴리테이아가 미치는 영향을 중시했다.

 

그에게 폴리테이아의 좋고 나쁨은 시민들이 훌륭한 개인 삶을 살 수 있는지 없는지가 달린 문제였다. 이는 좋은 시민이 좋은 정치를 만든다는 상식적 관점을 뒤집는 것과 같았는데 그 이후 인간과 정치에 대한 관념은 좋은 정치가 좋은 시민을 만들고 사나운 정치가 사나운 시민을 만든다는 방향을 향하게 되었다. 나치 치하의 독일인과 오늘날 독일인의 사회적 모습을 국민성의 문제로 설명할 수 있을까? 그게 아니고 전체주의와 민주주의로 구분되는 정치 체제의 도덕적 효과를 통해 시민성이 달라진 것으로 이해하고자 한다면 이는 다분히 플라톤적이다.


흔히 누군가를 가리켜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고 말할 때가 있다. 하지만 법 없이 유지되는 사회는 없다. 나아가 법 없이 살 사람도 법이 제대로 기능하는 사회에서 더 많아질 수 있다. 이처럼 플라톤은 좋은 정치를 통해 좋은 폴리테이아를 만들고 그 속에서 시민 개개인이 덕성과 지성의 힘을 키워갈 수 있게 되기를 희망했다.

 

그런 점에서 플라톤의 폴리테이아는 도덕적이고 공동체적인 특징을 갖는다. 폴리테이아 개념이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비판받았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플라톤은 민주정치의 한계를 넘어 이상적 폴리테이아를 설계하고 싶어했다. 현실의 정치가 불완전한 주장과 불안정한 의견에 휘둘려 기초도 없이 유동하는 것에 비판적이었다.

 

플라톤의 `국가`는 그런 정치 생태를 대체하는 일종의 체제 재설계자 혹은 체제 변혁자의 기획이었고 당연히 이상적 정체나 최선의 국가에 가까운 형상을 가졌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달랐다. 그는 존재하지도 또 존재할 수도 없는 이상적 폴리테이아를 설계하기보다는 이미 있는 여러 체제의 장점을 조합하고 단점을 제어하는 것에서 만족하려 했다.


플라톤이 이상적 최선을 추구했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적 최선을 선호했다. 1인 지배(왕정)도 소수 지배(귀족정)도 다수 지배(민주정)에도 단점만이 아니라 각기 다른 장점이 있다고 보았고 이를 혼합해 비교적 나은 체제를 만드는 것에 관심을 집중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사용한 폴리테이아 개념은 오늘날 국가나 정체로 번역되기보다 `헌법`이나 `혼합정`으로 번역되는 게 일반적이다. 이상적인 국가나 정체에 대한 헌신을 촉구하는 것이 현실에서는 공공의 선보다 공공의 무관심으로 이어지기 쉽다는 태도는 다분히 아리스토텔레스적이다. 반면 현실의 정치에서 특단의 조치나 근본적인 대책을 강조한다면 그것은 플라톤에 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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