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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풍지, 無風池, 舞風池
 
임일태 수필가 전 한국해양대 겸임교수   기사입력  2019/05/29 [16:55]
▲ 임일태 수필가 전 한국해양대 겸임교수    

어린 시절 걷던 길을 오랜만에 걸어본다는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설렌다. 통도사의 행사 개최로 매표소 옆에 임시주차장을 만들고 모든 차량을 통제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통도사까지 삼사십 분을 걸어야 하지만, 나에게는 기쁨이고 행운이란 생각이다. 어린 시절이 떠오르고 `물풍지`를 볼 수 있다는 기대로 지난날의 추억이 한꺼번에 몰려온다.

 

어린 시절 통도사 계곡에 물풍지라는 큰 소(沼)가 있었다. 물레방아가 있고 물이 풍부하여 여름철이면 아이들이 멱을 감던 곳이었다. 어른들은 물이 풍부하다고 `물풍지`라 한다고 했다.   물풍지에 있던 물레방아가 사라지자 물도 줄어들고 멱을 감는 아이들도 줄었다. 그 무렵 나는 통도사 경내에 있는 중학교에 입학을 했다. 매주 한두 번은 조회를 대웅전 마당에서 하고, 사월초파일이 다가오면 찬불가와 신불가 등을 배웠고 삼귀의를 낭송했다.


무풍지에서 통도사까지의 아름다운 소나무 길인 `무풍한솔길`을 오르내리면서 불교행진곡에 맞추어 행진연습을 할 때면 수업은 뒷전이었다. 불교계학교의 정규과목인 교학(敎學)에는 유독 無자가 들어가는 단어가 많았다. 담당 선생은 우리들이 물풍지라고 부르는 곳이 바람이 없는 못이라는 뜻의 무풍지(無風池)라고 알려주었다.

 

그리고 그곳도 통도사의 경내라는 말도 덧붙였다. 무풍지가 되고부터 그 곳을 지날 때면 왠지 바람이 잠잠함을 느꼈다. 절의 경내라서 부처님의 염력으로 바람까지 고요하게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도 들었다. 그러나 동네에서 무풍지까지는 논밭이라 바람이 세지만 무풍지부터는 숲이 막고 있기 때문에 바람이 잠잠하게 느껴진다는 현상을 생각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었다. 매표소를 통과하면 바로 무풍지가 나온다. 이젠 입장료를 내지 않고는 무풍지도 마음대로 볼 수 없다.

 

무풍지 위에 다리를 놓고 우회하여 차량전용도로를 만들고 나서 다리 위에 서 보는 것은 처음이다. 다리 아래에는 물이라고는 없다. 다리 이름을 무풍교라 하지 않았다면 그 곳이 무풍지가 있던 자리라고 생각하는 것조차 쉽지 없을 듯하다. `舞風橋` 교각에는 뚜렷하게 음각된 바람이 춤추는 다리라는 세 글자가 보인다.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나의 옷깃을 날리며 춤추듯 지나간다. 無風池라고 육십년간 알고 살았던 이름이 舞風池로 바뀌는 순간이다. 충격이다. 가슴에 잠잠한 파문이 인다. 한자의 뜻 하나 달라졌을 뿐인데…, 육십년의 믿음을 어떻게 바꾸어야 할지 가슴이 먹먹해진다. 이름이 바뀔 때마다 현상이 달리 보이고 생각이 달라진다. 단순히 글자가 한 자가 바뀐 것이 아니라 추억까지 달리 느껴진다. 물풍지와 함께한 유년시절이 떠오른다. 물이 풍부했던 물풍지에서 멱을 감던 초등학교 시절의 개구쟁이들이 천진난만하게 물장구치는 행복했던 모습이 보인다.


無風池와 함께한 오십여 년의 추억들, 치열한 삶을 살면서도 가끔 고향에 올 때 마다 무풍지를 지나면서 고요를 생각하며 옷깃을 여미고, 부처의 오묘한 진리를 생각하고, 고즈넉한 산사를 책가방을 들고 오르내리던 그 시절을 그리워하며 살았던 오십여 년의 세월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舞風池를 생각하며 살아야 할 여생, 바람이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그 움직임은 무엇을 뜻하는지. 생이 한 줄기의 바람이라면 그 바람은 지금 어디쯤에 가고 있을까를 생각하니 가슴 속에 휑하니 바람이 분다.

 

 공즉시색(空卽是色)이요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던 중학교 때 교학선생님의 말이 뜬금없이 떠오른다. 실체가 있음과 없음이 다르지 않다는 것도 알 듯 말 듯 한데, 또 바람의 움직임이 없음(無)과 바람의 움직임이 있는 춤(舞)이 같을 수 있다는 생각도 해본다. 물이 말라 없어진 못이 無風이면 어떻고 舞風이면 어쩔 것인가. 무풍한솔길을 걸으면서 해탈을 하는 것이 아니라 번민을 하는 것은 아닌지. 모든 것이 생각하기에 따라 달라진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가 솔바람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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