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진짜 기술은 아날로그(?)
 
김재범 도예가 자운도예연구소 대표   기사입력  2019/07/25 [19:46]
▲ 김재범 도예가 자운도예연구소 대표    

뼈아픈 일을 경험한 이들은 일부러 아픈 기억을 되새기려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기해년 가깝고도 먼 이웃 일본은 한국에 대해 수출규제라는 경제보복을 선언하며 양국 간 관계가 급속히 냉각되고 있다. 한국은 `자신들이 제조한 부품 조립상점에 불과하다`, `눈앞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디지털을 중시하고 아날로그를 소홀이한 대가의 결과`라며 과거 악몽을 되살리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427년 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발발한 일본은 조선의 경제에 큰 손실과 삶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가까이는 109년 전 대한제국의 국권 피탈로 35년간 일제가 강점한 치욕적인 식민통치 경력이 있다. 결코 단 한번이라도 격지 말았어야할 불행한 역사를 우리는 가까운 주변국들로부터 잊을만하면 당해왔다.

 

조선과 대한제국이 국운이 약한 지점에서는 어김없이 치욕을 겪었고 대한민국도 예외는 아니다. 이 지루한 비극을 끊을 방도가 있다면 이제는 주저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침략의 근성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일본을 비롯한 주변을 우리가 늘 경계해야하는 이유를 역사는 충분히 깨우쳐줬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어떻게 하고 있는가. 우리가 처한 문제를 똑바로 직시하고는 있는가? 과거와 달라진 것은 무엇인가? 반문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해있다.


국력을 키우고 우리가 압도할 힘을 가질 때까지는 화친을 해야 한다는 요설은 지겹도록 들었다. 뼈아팠던 역사를 이야기로만 끝내버릴 수 없는 이유를 우리 스스로 찾아야하지 않겠는가. `도자기 전쟁`이라 불리는 임진왜란은 조선의 도자기 문화에 커다란 타격을 입었다. 결과적으로 미래를 읽지 못하고 장인(匠人)을 경시하던 조선 조정(朝廷)을 비롯한  당시 사회풍조와 맞물려 우리 도자기 발전이 가로막히게 된 이유가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이삼평을 비롯한 심당길, 박평의, 이작광, 이경, 백파선 등 당시 일본에 빼앗겼던 조선의 사기장(일본식 표현`도공`)은 어림잡아 1천여 명이 넘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거기다 전국적으로 가마가 파괴되고 분청사기가 자취를 감추는 하나의 단초가 되었다. 문화와 기술은 단절되었으며 재료의 확보마저 쉽지 않았다. 당시 충격은 생각하는 그 이상이었다.

 

왜란(倭亂)이 끝난 후 광해군 연간에는 궁중에서 연례(宴禮) 때 사용할 도자기가 없어서 전국에서 수배하였다고 한다. 이와 반대로 임진왜란 이전까지 자기를 만들 수 없었던 일본은 비로소 백자를 생산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최고의 중흥을 맞는다.


오늘날 규슈(九州)와 야마구찌현(山口縣)을 비롯한 일본 도자산업의 번성이 조선 사기장들의 공헌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특히 이삼평(李參平)이 아리타(有田) 이즈미야마(泉山)에서 백토를 발견하고 백자를 만들게 되면서 가능해진 역사적 사실이다. 일본이 그를 도조(陶祖)로 모시게 된 연유다. 또한 이러한 계기는 좋은 도자기(茶碗)를 갖고 싶어 하는 당시 일본차인과 특히 다이묘(大名 유명인사)들의 지원은 그들의 소망을 충족시키기에 충분하였다. 일본학자들이 `다완전쟁`이라 일컫는 것도 이 대목에서 기인한다. 아리타(有田), 가라쓰(唐津), 다카토리(高取), 우에노(上野) 등지에서는 일본의 생활환경과 취향을 고려한 자기들을 생산하며 빠르게 발전을 이끌었다. `이마리 자기`가 탄생하기 전까지 유럽시장을 석권하고 있었던 것은 중국의 청화백자였다. 당시 중국도자기는 정치적으로 불안정했던 명ㆍ 청 교체기의 전란을 겪으며 주춤거리고 있었다. 1616년 누르하치가 만주를 평정하고 금나라를 세웠고, 다시 중국 본토를 통일하고 나라이름을 대청국(大靑國)으로 정하던 시기였다. 그 틈을 타고 유럽에 도자기를 수출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유럽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된다.


심지어 자기를 포장해갔던 우키에요(다색판화) 마저 인상파 화풍에 영향을 미칠 정도였다. 일본 아리타자기는 이마리(伊萬里)항을 통하여 유럽에 전해져 이마리 자기로 불렸다. 1610~1650년대 초기엔 청화만 그려 약간 두텁게 유약이 발린 백자를 생산하였다. 이후 단색조에서 다채색으로 획기적인 발전을 보이다 1670~1690년대 `가키에몬 양식`으로 확고한 자리를 잡는다. 이 양식은 유럽의 궁전을 장식했을 뿐만 아니라 독일의 마이션, 프랑스의 샹티이 가마 등에서 모방되기에 이른다. 오늘날 일본의 부흥을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문화적 이미지를 유럽에 각인시킨 배경이다. 일본의 근대화는 물론 국제적으로 문화 국가로서의 번성을 가능하게 한 장본인이 우리가 그토록 가벼이 여기던 조선의 사기장 출신이었단 사실이 마음시리다.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톡
기사입력: 2019/07/25 [19:46]   ⓒ 울산광역매일
 
롯데백화점 울산점 https://www.lotteshopping.com/store/main?cstrCd=0015
울산공항 https://www.airport.co.kr/ulsan/
울산광역시 교육청 www.use.go.kr/
울산광역시 남구청 www.ulsannamgu.go.kr/
울산광역시 동구청 www.donggu.ulsan.kr/
울산광역시 북구청 www.bukgu.ulsan.kr/
울산광역시청 www.ulsan.go.kr
울산지방 경찰청 http://www.uspolice.go.kr/
울산해양경찰서 https://www.kcg.go.kr/ulsancgs/main.do
울주군청 www.ulju.ulsan.kr/
현대백화점 울산점 https://www.ehyundai.com/newPortal/DP/DP000000_V.do?branchCd=B00129000
  • 도배방지 이미지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