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 세종께서는 `ㅿ`자 또한 받침에 썼다. 그러던 것을 최종 `ㅅ`으로 표기하는 철자법을 제정하였는데, 그 과정에서의 고심은 매우 컸을 것이다. 동국정운(1447)에 쓰인 원칙적 조선한자음의 받침은 `ㆁㆍㄱㆍㄴㆍㅭㆍㅁㆍㅂㆍㅱㆍㅇ`의 8개자였다. 그에 비해 현대한국어에서 한자음을 적는데 쓰이는 받침^종성은 `ㄱㆍㄴㆍㄹㆍㅁㆍㅂㆍㅇ`의 6개자로 줄어들었다. 한자음이 아닌 토속어를 적음에 있어, 세종대왕이 최종 `팔종성가족용법`으로 규정한 받침은 `ㄱㆍㆁㆍㄷㆍㄴㆍㅂㆍㅁㆍㅅㆍㄹ` 8개자였다(`ㅅ`은 토속어용). 그런데 지금의 한글 체계에서는 그 수가 대폭 늘어난 `ㄱㄴㄷㄹㅁㅂㅅㅇㅈㅊㅋㅌㅍㅎㄳㄵㄶㄺㄻㄼㄽㄾㄿㅀㅄㄲㅆ`의 27개자가 받침으로 쓰이고 있다.
받침 수의 증가는 우리글이 한층 더 복잡해졌음을 의미한다. 현대한국어 토박이말을 적는데 사용되는 받침은 형태적으론 27개이나 발음상으론 `ㄱㆍㄴㆍㄷㆍㄹㆍㅁㆍㅂㆍㅇ`의 7개 소리로만 구현된다. 받침에서 `ㄷㆍㅌ`은 물론 `ㅅㆍㅈㆍㅊ`은 모두 `ㄷ` 소리로 발음된다. 일제 치하 시 제정된 `한글 맞춤법 통일안(1933)`에서 위와 같이 받침 수를 대폭 늘인 까닭은 "철저하게 기본형과 어원을 살려 표기"하고자 함이었다. 다시 말해 표음문자를 가급적 한자와 같은 다양한 자형의 표의문자처럼 만들기 위함이었다.
본래 우리말 토속어 받침 수를 8종성법에 의한 것보다 더 많게 구상했던 최초의 인물은 세종대왕이었다. `훈민정음해례` 편 18장에는 `곶ㆍ여ㅿㆍ갗`이라 하여 8종성에는 없는 `ㅈㆍㅿㆍㅊ` 자도 받침에 쓰였다. 여기서의 1음절어 `여ㅿ(狐)`은 `여우`이다. 우리말 방언에선 아직도 `여우`를 `여시` 또는 `여수`라고 부른다. 그 앞에 무시무시한 강조사가 덧붙어 `불여시`, `백여시`로 변모하는 `여시`는 `월인석보(1459)` 권2가 증명하듯, 본래 `엿`에서 비롯된 말이다.
그런데 세종은 그 `엿`의 받침을 `ㅅ`이 아닌 반치음 `ㅿ`으로 기재해놓았다. 그와 달리 `호박엿`할 때의 `엿`은 지금처럼 `ㅅ`으로 적었다(해례 편 26장). 먹는 `엿`과 여우의 `엿`은 성조는 다르지만 그 발음은 서로 같은데, 세종께서 먹는 엿의 종성은 `ㅅ`으로 여우의 엿은 `ㅿ`으로 쓴 까닭은 무엇일까? 반치음 관련 지난 글들에서 밝힌 것처럼 `종성 ㅅ`과 `종성 ㅿ`은 혀의 위치와 모양, 발음이 완전히 같다.
세종은 그 점에 주목 및 고심했을 것이다. 귀에 들리는 `ㅅ, ㅿ, ㅈ, ㅊ`의 받침소리는 하나이나 눈에 보이는 공간의 여지는 둘 이상이다. `ㅅ`과 `ㅿ` 둘 다를 활용할 수 있다면 달콤한 `엿`과 달콤하게 마음을 꾀는 `엿(여우)`, `갓(겨우, 방금)`과 `갓(가장자리)`처럼 우리말 토속어 중 동음이의어들은 자형 면에서 구별할 수 있게 된다.
그 같은 발상 하에, 먹는 `엿`은 종성을 `ㅅ`으로, 여우의 `엿`은 `ㅿ`으로 정했다. 아래아(ㆍ)자를 쓰는 `갓(방금)`은 석보상절(1447)에서처럼 `ㅅ`으로, `갓(가장자리)`은 용비어천가 68장에서처럼 `ㅿ`을 쓰는 것으로 정해 서로 자형을 달리했다. 그 정한 기준은 해당 1음절 단어의 2음절로의 변화 유무였다. 즉, 먹는 `엿`이나 `갓(방금)`처럼 1음절어로만 쓰여 변화가 없는 말은 받침에 치음의 기본자인 `ㅅ`을 썼다. 훈민정음 언해본에서 `첫(初)`이 `처ㅿㅓㅁ`으로도 나타나듯, 세종 당시에 2음절어 `여ㅿㆍ(월인천강지곡 70)`도 동시에 존재했던 `엿(여우)`은 `여ㅿㆍ`에서 분명히 `ㅿ`이 드러남으로 그것과 맞추어 종성도 `ㅿ`을 썼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하면, 치음 종성은 `ㅈ`도 써야 되고 `ㅊ`도 살려 써야 한다. 종성의 수가 늘어날수록 훈민정음은 더 어려워진다. 숙고 끝에 세종은 백성들이 쉽게 익혀 일용에 편안하도록 귀에 들리는 발음을 기준으로, 토속어 받침은 8개자로써 족히 쓸 수 있다는 철자법을 최종 공포한다. 그로부터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 한글은 8종성법을 깨고 그 3배가 넘는 27개 받침으로써 표의문자화를 꾀했다. 쉽다면야 괜찮으나 지나치게 복잡해져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