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팽이가 지나간 배춧잎은 텅 비어 있다
비어 있는 문양은 느린 시간의 발자국, 무형의 무늬 속으로 늦여름이 빠져 나간다 사각사각 초침들이 배추 이파리를 지날 때 점액질 흰 달은 둥글게 살이 찐다 여름의 막바지들이 겹겹으로 들어차고 막바지에 다다른 파란을 달팽이가 갉아 먹는다 파란의 흉터는 공중의 숨구멍
모든 흉터는 파란이 파란波瀾을 겪으며 걸어온 흔적이다
달팽이가 지나온 흔적 너머로 늙은 개가 하품을 하고 밀잠자리들이 고춧대 끝에서 구름의 전파를 잡는다 알밤이 툭툭 가을을 세고 수수열매 자루들마다 공중을 쓸고 있다
지금은 배추들이 겉잎을 버리는 시간 풀벌레 소리가 배춧잎으로 스며드는 시간 햇살과 바람의 끝자락이 알곡처럼 자루에 담기는 시간
오른돌이바람이 천천히 공중의 시간을 돌리고 있다
벌레들이 숭숭 파먹은 배춧잎, 그 무형의 무늬를 보며 나는 느린 시간의 흔적을 발견한다. 시간의 흔적 속에는 누구나 겪었을 파란波瀾이 들어 있다. 아픈 만큼 마음도 넉넉하게 넓어져 누군가에게는 따뜻한 숨구멍이 되리라 믿는다. 파란을 겪으며 걸어온 그대들에게 따뜻한 가을 햇살을 알곡처럼 한 자루 담아 선물로 드린다. 부디, 힘을 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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