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의자가 있는 풍경
 
유서희 수필가   기사입력  2019/11/21 [17:51]
▲ 유서희 수필가   

몇 해 전 동해 바닷가를 달리다 아이보리색 소파가 바다를 마주보며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짙은 쪽빛과 아이보리색의 조화가 한 폭의 명화로 담겼다. 바다를 바라보는 의자의 주인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어떤 생각을 했을까. 스치는 풍경이었지만 의자에 대한 강한 인상으로 남아있다. 바다를 지나는 일이 있을 때면 습관처럼 의자가 있는 풍경을 찾게 된다. 의자만큼 편안한 쉼이 있을까. 그 이름만으로도 위안이 된다. 흔들의자가 갖고 싶었던 적이 있다. 엄마의 품이 되어 봄바람처럼 흔들어주는 의자에 몸을 누이고 요람 속의 아기가 되고 싶었다.

 

한 해 동안 받은 선물 중에 가장 인상 깊은 것은 우가포 가는 길이다. 지난 유월의 어느 날, 좋은 풍경을 선물로 주겠다는 그녀를 따라 우가포로 갔다. 해안가로 내려가자 눈 앞에 펼쳐진 장관에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바람은 해안의 돌들을 모두 바닷 속으로 밀어 넣을 기세다. 길가에 마중 나와 있는 찔레는 꽃잎을 생글거리며 우가포의 바람을 즐기고 있었다.

 

파도에 밀려 바닷물이 얼굴에 뛰어 들만큼 바다와 가까운 길이 펼쳐졌다. 파도소리가 소란스럽기는 하나 인적이 드물고 좁은 길이라 `바다오솔길`이라 이름을 지었다. 바다도 마음에 든다는 듯 찔레꽃 향기를 코끝까지 밀어 올린다. 귀한 분홍찔레가 곳곳에 고개를 내민 앙증맞은 모습에 반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마음을 빼앗긴 것은 곳곳에 놓여 있는 나무 의자였다. 의자에 앉아 바다를 한없이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앞에선 바닷바람이 불어오고 등 뒤의 길은 높아 아늑했다. 얼굴을 감싸며 휘감기는 바닷바람에 몸을 뒤로 젖히고 눈을 감는다.


고향집 담장 아래 앉아 계시는 어머니가 떠오른다. 엉덩이에는 목욕탕 의자에 두터운 솜 같은 천으로 감싼 둥근 의자가 어머니의 무게를 받치고 있다. 오종 오종 내려 앉은 햇살이 머리에서 등으로 흘러내리며 온기를 채우고 있다. 그 곳에 앉아 마늘을 까는 어머니의 손놀림이 분주하다. 종갓집 맏며느리로 치매와 중풍에 걸린 할머니의 병수발과 사람 좋아하는 아버지의 부재로 어머니의 허리는 펴 질 날이 없었다.

 

그나마 한 곳에 앉아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마늘을 까는 그 시간이 어머니에겐 유일한 휴식이었다. 어머니와 함께 한 시간이 많았던 나는 어머니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내가 옆에 앉았다 하면 입버릇처럼 넋두리를 늘어놓으셨다. 그럴 때마다 나는 어머니의 의자가 되어 삶의 무게를 짊어 져야만 했다. 처음엔 무슨 말인지 알아 들을 수 없어 눈말 멀뚱 거렸지만 그런 시간이 늘어나면서 이제는 한 편의 소설처럼 엮어져 추억 속의 시간에게 읽혀지고 있다. 어머니는 무게를 가리지 않고 내게 풀어 놓으셨다.

 

그래서 언제나 나는 어머니와 함께 할 밖에 없었다. 어머니에 관한 일이라면 나는 열일을 제쳐 두고 함께 울어야 했다. 그러나 어머니의 삶을 받쳐 들기엔 나는 너무나 작고 약한 의자였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어느 날, 언니가 친정에 아이를 맡겨 두고 돈을 벌어야 했으므로 조카를 돌보는 일은 곧 나의 일이 되었다. 그날도 집안일과 농사 일로 불철주야로 틈이 없었던 어머니는 빨리 조카를 재우고 지친 육신을 누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을 것이다.


그런데 꿈길로 접어든 조카가 너무 귀여워 볼을 만지다가 그만 깨우고 말았다. 잠결에서 깬 조카의 울음은 겹겹의 어둠을 산산이 깨울 듯 그칠 줄 몰랐다. 어머니의 화는 극에 달했고 그 화살은 곧 나에게 쏟아졌다. 갖은 악담과 윽박에 감당하지 못하던 나는 사랑채로 피했지만 사랑방 문밖에서도 어머니의 화풀이는 계속되었다. 더 이상 참지 못한 나는 무작정 집을 떠났다. 생의 첫 가출이었다. 버스를 타기 위해 신작로를 걷는 곳까지 나를 부르는 아버지의 애절함이 따라왔다.

 

공중전화가 유일한 통신수단이었던 그 때, 무작정 갈 곳이라곤 친구의 자취방이었다. 그 일이 있은 후, 앙칼지게 쏘아 붓던 어머니의 언행은 얌전한 고양이가 되었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어머니의 넋두리를 받아 주는 일은 변함이 없었다. 지금은 고향집도 어머니가 앉아서 일하시던 둥근 의자도 빛바랜 추억 속으로 잊혀져 가고 있다. 한참 동안 바다를 바라보다 다시 길을 걸으니 또 다른 의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다시 의자에 앉았다. 같은 소재와 같은 디자인이지만 다른 느낌이었다.

 

풍경도 바뀌었지만 바다는 여전히 나의 눈 속에 들어 와 있다. 끊임없이 출렁이는 저 바다도 아무도 어쩌면 모르게 이 의자에 자신의 모습을 바라볼 지도 모른다. 의자가 바다의 쉼이 되고 바다가 의자의 쉼이 되어 줄 것이다. 나의 의자를 생각한다. 순간순간의 소중함을 함께 나누고 위안이 되어 주는 사람. 쉽게 말 못할 고민도 편안하게 털어 놓을 수 있는 사람. 그들에게 좋은 풍경 하나 걸어 주는 가을. 햇살이 참 따뜻하다.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톡
기사입력: 2019/11/21 [17:51]   ⓒ 울산광역매일
 
롯데백화점 울산점 https://www.lotteshopping.com/store/main?cstrCd=0015
울산공항 https://www.airport.co.kr/ulsan/
울산광역시 교육청 www.use.go.kr/
울산광역시 남구청 www.ulsannamgu.go.kr/
울산광역시 동구청 www.donggu.ulsan.kr/
울산광역시 북구청 www.bukgu.ulsan.kr/
울산광역시청 www.ulsan.go.kr
울산지방 경찰청 http://www.uspolice.go.kr/
울산해양경찰서 https://www.kcg.go.kr/ulsancgs/main.do
울주군청 www.ulju.ulsan.kr/
현대백화점 울산점 https://www.ehyundai.com/newPortal/DP/DP000000_V.do?branchCd=B00129000
  • 도배방지 이미지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