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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만 오천 평
 
임일태 수필가 전 한국해양대 겸임교수   기사입력  2020/01/01 [15:41]
▲ 임일태 수필가 전 한국해양대 겸임교수    

그를 대하기가 몹시 불편하다. 조금 전만 해도 참 편안하게 대하던 그가 아닌가. 한 시간 전 군청에서 농지실태조사를 나왔다. 경운기로 우리 텃밭을 갈고 있는 그를 발견하고는 마침 잘되었다며 불렀다. 그의 주소와 이름을 확인하고는 소유하고 있는 농지 면적을 물었을 때 그는 머리를 끌쩍이며 멋쩍게 웃으며 "일만 오천 평"이라고 했다. 조사원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만 오천 평?" 하면서  장부를 뒤적거리다 고개를 꺼덕였다.

 

그리고 나와 그를 번갈아 쳐다보다 수고하라는 인사말과 함께 묘한 웃음만을 남기고 가버렸다.  팔백 평 가진 주제에 만 오천 평 가진 재벌을 머슴처럼 부리는 희한한 일도 있구나 하고 비웃는 것은 아닐까. 기분이 묘하다. 머릿속은 온통 만 오천 평, 못해도 칠십오억 원은 되겠지 하는 생각뿐이다.

 

그는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듯이 계속해서 경운기로 밭을 갈고 있다.  그에게 밭갈이를 부탁한 것은 부자가 아니어서 만만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사람을 신언서판(身言書判)으로 평가 한다지만 부가 세상을 지배하는 자본주의 사회인 지금은 경제력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 같다. 다만 신언서판으로 경제력을 갈음할 뿐이다.


그는 작은 키에, 깡마른 체구, 머리는 늘 부스스하게 까치집을 지어있고, 얼굴을 햇볕에 그을려 까만데다 숙취가 남아 얼굴은 늘 부어있고, 앞니는 빠져 혐오스럽기 까지 하다. 옷은 늘 흙 묻은 작업복 차림이었다. 누가 보더라도 빈티가 절절 흘렀다. 그는 좀처럼 말이 없었다. 어쩌다 몇 마디 하는 말도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가 글을 아는지, 쓸 수는 있는지, 글씨는 어떤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전형적인 농사꾼이다. 농사일은 어느 누구 못지않았다. 고추를 언제 심어야할지. 농약은 무엇을 쳐야할지. 초보농사꾼인 나는 농사일만큼은 모두 그가 하는 대로 따라하고 있다. 초보 농사꾼인 내가 그를 선택한 만만한 이유였다.  만 오천 평, 칠십오억 원 상당의 재산을 가진 재벌이라니. 베풀고 있다고 우쭐했던 나의 만용이 부끄럽기 그지없다.

 

만약에 처음부터 그렇게 많은 농토를 가진 줄 알았다면 감히 부탁할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가난해 보여 만만했던 것은 같은 품삯을 주더라도 받는 사람이 가난하면 그 가치를 크게 느낀다고 생각해서였다. 사람이 이렇게 간사하게 될 줄이야. 일만 오천 평 때문에 신언서판이 다르게 보인다. 많은 농사를 지으려면 종일 햇볕에 나가 그을릴 수밖에 없다고. 까맣게 탄 얼굴은 부지런하다는 증거라고, 키 작은 것을 두고 그를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왜소한 몸매는 많은 일에 살이 붙을 틈이 없어서다.


일부러 다이어트 한다고 애쓰는 도시인들에 비하면 다이어트 비용은 거저 벌었다는 생각이다. 머리가 부스스한 것은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 까지 모자를 썼다가 벗기를 수십 번을 하는데 부스스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하다고, 이가 빠져도 당장 눈앞에 일을 두고 멀리까지 치료하러 갈 만큼의 여유 시간이 없는 것이 농촌의 실정이다. 세련된 달변보다 순수한 눌변을 나쁘다고 감히 이야기할 수 없는 노릇이다.

 

오죽하면 침묵은 금이라고 까지 했을까. 만 오천 평의 과수원을 하면서 고된 노동을 술의 힘을 빌려 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도 든다, 예전에 아버지가 "농촌사람은 술 힘으로 일하는 거여."하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모든 일에는 전문가가 있듯이 그는 전문 농업인이라고 좋게 생각하며 이해하려든다.  물신주의를 비판하면서도 나 자신도 모르게 재물로 사람을 평가하고 대접하는 문화에 깊숙이 빠진 것이 아닌지 반성해 본다.  

 

일을 끝내고 나온 그에게 그렇게 많은 농사를 짓는 줄 모르고 부탁해서 죄송하다면서 앞으로 다른 사람에게 부탁 해야만 해야 할 것 같다고 말하자 그는 손사래를 치며, 다 떠나고 없는 동네에 이웃 하나 생겼는데 다른 일은 못해도 해드려야지요 라고 말한다. 많은 농사일로 일 년 열두 달 뼈 빠지게 고생해도 가을에 농약 값, 비료 값 등 농협 융자금 이자 갚고 나면 적자 나기 일쑤란다. 그래도 배운 게 농사 밖에 없어 어찌하지 못한단다. 부동산 가격이 오르자 앞 다투어 팔고 다 떠난 자리에 전원주택 단지가 들어섰다. 우직하게 농사를 짓고 사는 그를 위해서라도 올해는 풍년이 들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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