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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수의 역사소환
倭 가토 기요마사 "나는 이곳에서 할복 할 것"
明군, 목숨 걸고 싸울 이유 없어…朝明군 철수 결정
정유재란 울산 학성왜성에 갇힌 왜군들 말(馬)잡아 식량ㆍ식수 대체
미완의 승리로 끝난 울산성 전투…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싸움
 
윤영수 방송작가   기사입력  2020/01/05 [18:05]
▲     ©편집부

 방송작가 윤영수 씨가 새해부터 본보에 울산과 관련된 역사 기획을 연재한다. 변화를 요구하는 도시의 갈망을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을 통해 녹여내기 위해서다. 윤 작가는 KBS, MBC, EBS 등에서 약 30년간 역사물 특집을 기획했다. 특히 KBS `역사 스페셜`은 그의 빼어난 작품 가운데 하나로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편집자 주>

 


프롤로그
역사는 위기와 극복의 연속이었다. 태평성대는 위기를 잉태하고 있었고 위기는 극복을 요구했다. 이 끊임없는 순환이 바로 역사였다. 위기와 극복의 역사, 그러나 미리 진단하고 예방하지 못한 위기는 처절했다. 그 본보기 중의 하나가 바로 임진왜란이었다.


420년 전의 임진왜란 7년 전쟁, 처절한 저항 끝에 위기를 극복했으나 미리 대비하지 못한 댓가는 컸다. 이제 그 위기와 극복의 순간을 다시 소환하려 한다.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다섯 개의 장면을 소환, 역사 속에서 진정한 교훈을 찾으려 한다. 그 첫 편으로 울산성 전투를 다시 만나 본다.


1597년 그해 겨울 울산
1597년 12월 23일, 태화강 언덕 위 울산왜성의 성루를 지키던 일본군들은 믿기 어려운 장면을 목격했다. 성 아래 울산 벌판에 적병이 마치 개미떼처럼 몰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찬바람 부는 겨울 날씨인데도 이들의 등에는 진땀이 흘렀다.


적병의 출현은 곧장 최고 지휘관에게 보고되었다. 당시 울산왜성을 지키던 장수는 가토 기요마사, 임진왜란 당시 조선침공의 제2선봉장이었다. 임진왜란 초기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함경도까지 진출, 조선의 왕자 둘을 사로잡기도 했던 바로 그 인물이었다.


마치 거짓말처럼 나타난 적병들은 곧장 울산왜성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조선군 1만 천5백명, 명나라 군사 3만 6천, 도합 5만의 조명연합군은 울산왜성을 겹겹이 포위했다.
임진왜란 최후의 승부처 울산성 전투의 서막은 그렇게 오르고 있었다.


선택
1592년 4월 13일, 16만 일본군이 전격적으로 조선을 침공했다. 제1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제2 선봉장 가토 기요마사등 일본군은 모두 9개 부대로 나뉘어 부산으로 상륙했다.


이들은 순식간에 부산진성 동래성을 점령한 다음 세 갈래로 북상했다. 일본군은 부산에 상륙한 지 20일만에 서울을 점령했다. 신식 무기 조총을 앞세운 일본군 앞에 조선 육군은 무기력했다. 선조는 서울을 버리고 몽진을 떠났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선조를 쫓아 평양까지 진격했으며 가토 기요마사는 함경도까지 진출했다. 바야흐로 조선이라는 나라의 운명이 꺼질 무렵, 기적이 일어났다. 이순신의 조선수군이 연전연승을 거둔 것이다. 바닷길을 통한 보급이 막힌 일본군은 기세가 꺾였다.
임진년 12월 명나라 지원군이 참전하면서 동아시아 국제전으로 비화되면서 일본군의 기세는 더욱 꺾였다.


전쟁은 명과 일본의 강화 협상등으로 긴 소강상태에 빠졌다. 그러나 그들만의 협상이 깨지면서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했다. 또다시 기적이 일어났다.
일본군에 의해 괴멸당하다시피한 조선수군은 이순신의 지휘 아래 명량대첩을 일구었다.

 

북상하던 일본육군은 충청도 직산에서 명군에 막히고 말았다. 이제 일본군은 순천에서 서생포까지 동남해안에 28개의 왜성을 쌓고 장기전 태세를 갖췄다.순천은 고니시 유키나가, 울산은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가 주둔했다. 전열을 갖춘 조명연합군은 순천과 울산 중에서 울산을 먼저 선택했다.


`부산과 서생포는 왜군의 소굴이므로 먼저 쳐야 한다`
경상도 공략론이 힘을 얻었고 이에 5만의 조명 연합군이 울산성 공격에 나선 것이었다.


치밀한 전략
임진왜란 막바지의 울산성 전투, 조명연합군은 울산성 승전으로 전쟁을 끝내려했다. 5만 대군으로 울산성을 겹겹이 포위한 조명연합군, 그들은 일본군 고립 작전에 착수했다. 이에 조명연합군은 태화강 하류쪽에 기마병을 매복시켰다. 그리고 서생포로부터 다가오는 일본군 구원병을 격퇴했다. 양산에 주둔한 일본군도 막아냈다.


멀리는 남원에 주둔한 일본군의 이동까지 견제했다. 이처럼 치말한 전략과 군사배치로 조명연합군은 울산왜성의 일본군을 완전히 고립시켰다. 전투 초기, 조명연합군의 전략은 효과적이었다. 성안의 일본군들은 조명연합군의 파상공세에 고전을 면치 못했다.


당시 참전했던 일본 승려 경념이 남긴 `조선일일기`는 당시의 울산왜성 내부 사정이 잘 기록돼 있다.
`아침에 연기가 솟아오르고 대포소리가 들려 어떻게 된 일이냐고 하니 적군이 기습을 했다고 한다. 적군은 돌담 밑에서 맹렬하게 불화살을 쏘아댔다.

 

성 안에는 많은 물품이 있었는데 모든 상자에 불이 붙었다. 타오르는 연기 때문에 눈을 뜰 수도 말을 걸 수도 없었다. 이 때문에 많은 장수와 군사들이 불에 타 죽었다.`
가토 기요마사도 위기감을 느꼈다. 임진왜란 내내 조선군과 조선백성들에게 `야차`처럼 인식되던 가토 기요마사, 그는 다른 장수에게 보내는 서한 `울산농성각서`에서 자신의 최후를 밝히고 있다.

 

`나는 항복하지 않고 이곳에서 할복할 것이오. 당신은 그 성에서 자살하시오.`
이처럼 치밀한 전략의 조명연합군은 가토 기요마사군을 극한의 상황까지 몰아붙였다.


울산성 전투도의 증언
임진왜란 당시 조선침공의 교두보 역할을 했던 일본의 나고야 성,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을 받아 가토 기요마사가 축성한 것으로 알려진 이 성에는 임진왜란 전문 박물관이 있다.


이 박물관에는 울산성 전투를 그린 6폭 병풍 그림이 전시돼 있다. 울산성 전투 당시 구원병으로 참전했던 나베시마 나오시게의 가신이 그린 그림이다. 6폭 병풍으로 그려진 전투도는 모두 석 점인데 지금은 한 폭만이 공개되고 있다.


울산성 전투도는 매우 세밀하고 사실적으로 묘사돼 있다. 울산왜성을 수십 겹으로 에워싼 조명연합군의 표정까지 생생하다. 성벽을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치열한 혈투, 성 안의 일본군 전사자와 부상자등이 마치 눈 앞에 펼쳐지듯이 그려져 있다.


그런데 전투도 중에서 눈에 띄는 장면이 있다. 일본군들이 말을 잡고 있는 장면이다. 전투가 한창인데 말을 잡는 일본군들, 바로 식량과 식수 때문이었다.
울산성 전투 당시 일본군의 가장 큰 약점은 식량과 식수였다.

 

한겨울, 겹겹이 포위된 성, 식량은 급속히 줄었다. 당시 일본군 주력군이던 소총수한테는 하루 생쌀 한홉만 지급되었다. 나머지 군사들은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당시 참전했던 일본군 중급무사가 남긴 `조선물어`라는 기록의 일부,`다리가 점점 야위어 각반을 차니 자꾸 발쪽으로 내려간다`


중급 무사도 살이 빠질 정도로 일본군들의 식량난은 극심했던 것이다. 식수도 문제였다. 당시 울산왜성 안에는 우물이 없었다. 우물은 모두 성 밖에 있었는데 조명연합군은 이 우물을 돌로 메워버렸다. 하는 수 없이 일본군들은 밤중에 몰래 태화강으로 내려와 물을 마셔야 했다. 그러나 이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조선물어에도 그 사정이 나온다.


`물은 낮에는 구할 수 없어 밤에 구하러 갔다. 물을 구하러 갔으나 많은 시체가 있었다 그조차 제대로 마실 수 없어 할 수없이 피 섞인 물을 마시고 갈증을 달랬다`
성 안의 일본군들은 종이를 씹고 벽의 흙을 끓여먹었다고 조선물어는 전한다. 심지어 자신의 오줌을 받아먹었다고도 전해진다.


미완의 승리
곧 조명연합군의 승리가 실현될 것 같던 전황, 그러나 공격 13일 만에 조명연합군은 경주방향으로 퇴각하고 말았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첫째는 울산왜성이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일본으로 돌아간 가토 기요마사가 7년에 걸쳐 축성한 구마모토성을 보면 당시 울산왜성을 짐작해볼 수 있다. 구마모토성은 몇차례 일본 내전에서 단 한번도 함락된 적이 없는 요새였다.


우선 성 입구의 구조부터 달랐다. 성 안으로 진입하는 길은 몇 차례 꺾여 있었다. 적이 빠른 속도로 공격해오는 것을 막기 위한 구조였다. 이를 호구(護口)라 불렀다. 꺾어진 입구에 도달한 적을 최소한 세 방향에서 공격할 수 있었다. 탁월한 방어구조였다.


1986년의 울산왜성 발굴조사에서도 이런 성 입구 구조가 밝혀졌다. 또한 당시 기록에 따르면 울산왜성은 최소 4미터에서 최대 14미터 높이를 갖고 있었다. 조명연합군은 지형적으로 불리할 수 밖에 없었다.


성 벽 위에는 `야구라`라는 목조 구조물도 있었다. 평시에는 창고로 사용하다가 유사시에는 방어 시설로 활용했다.
낮은 곳에서 공격하는 조명연합군에게 높은 성벽과 `야구라`는 어려운 상대였다.


각지에서 일본군 구원병들도 속속 도착했다. 순천의 고니시 유키나가군 일부도 합세하면서 일본군은 6만 여명으로 늘어났다. 거기에 날씨도 추웠다, 무엇보다 명나라군 입장에서는 울산왜성에서 목숨 걸고 싸울 이유가 없었다. 그들은 전선이 압록강만 넘어오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결국 모든 악조건에서 조명연합군은 철수를 결정할 수 밖에 없었다.


울산성 `대첩`
울산성 전투 이후 가토 기요마사는 서생포에 웅거하고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일본 장수 13명은 더 이상 전선을 유지할 수 없다는 연명서를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올렸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터무니 없는 일이라고 일축했다.

 

이 탓에 장수들은 코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크게 실망하고 전의를 상실했다. 7개월 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죽었고 일본군은 철수를 결정했다. 사실상 울산성 전투에서 임진왜란은 끝이 난 것이었다. 가토 기요마사는 구마모토 성을 쌓으며 성 안에 우물을 120개나 팠다.


모든 건물의 다다미는 고구마 줄기를 섞어서 짜도록 했다. 울산성 전투가 남긴 트라우마였다.
미완의 승리로 끝난 울산성 전투, 그러나 그것은 전쟁을 승리로 이끈 싸움이었다. 따라서 울산성 전투는 `대첩`이었다.


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다고 해서 대첩으로 불리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이 싸움이 대첩으로 불릴 때 충의사에 모셔진 227위의 의사와 무명신위, 그리고 5천 8백여 조명연합군 전사자들도 새롭게 자리매김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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