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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수의 역사소환 2
수군이 이끈 승리-한산대첩
 
윤영수   기사입력  2020/01/19 [17:16]
▲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표준영정   
▲  한산도 앞바다 학익진 재현모습.  



 

<프롤로그>
역사는 위기와 극복의 연속이었다. 태평성대는 위기를 잉태하고 있었고 위기의 시대는 극복을 요구했다. 이 끊임없는 순환이 역사였다. 따라서 미리 진단하고 예방하지 못한 위기는 처절했다. 그 본보기 중의 하나가 바로 임진왜란이었다.
420년 전의 임진왜란 7년 전쟁, 처절한 저항 끝에 위기를 극복했으나 미리 대비하지 못한 댓가는 컸다.
이제 그 위기와 극복의 순간을 다시 소환하려 한다.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다섯 개의 장면을 소환, 역사 속에서 진정한 교훈을 찾으려 한다. 그 두 번째 장면으로 한산대첩을 만나본다.

 

<한산대첩의 숨은 영웅 김천손>

 "장군을 만나게 해주시오."
 "넌 누구냐?"
 "목자 김천손이라 하오!"
 "목자는 말을 기르는 자가 아니더냐? 어떤 연유로 장군을 만나자는겐가?"
 "급한 일이오. 시급한 일이외다."

 

1592년 7월 7일 저녁 무렵, 이순신 함대가 진을 치고 있던 당포(경남 통영시 산양읍 삼덕리)에 땀으로 범벅이 된 한 사내가 나타났다. 그는 다짜고짜 이순신을 만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사내는 김천손이라는 인물로 미륵도에서 나라의 말을 키우던 천민이었다. 김천손과의 만남을 이순신은 왕에게 올리는 보고서, 장계에 그대로 기록해 두고 있다.


<샛바람이 세게 불어 항해하기 어려웠다. 고성 땅 당포에 이르자, 날이 저물어 나무하고 물 긷고 있을 때, 피난하여 산으로 올랐던 그 섬의 목자 김천손이 우리 함대를 바라보고는 급히 달려와서 말했다. `적의 대ㆍ중ㆍ소선을 합하여 70여척이 오늘 낮 두 시쯤 영등포 앞바다에서 거제와 고성의 경계인 견내량에 이르러 머무르고 있다`고 하므로, 다시금 여러 장수들에게 신칙했다 -견내량파왜병장 중에서>


임진왜란 3대 대첩 중의 하나인 한산대첩은 이렇게 통영 미륵도의 한 천민의 정보 보고에서 비롯되었다.  20여 킬로미터를 달려 온 김천손, 그의 정보는 정확했다. 대첩의 기본 조건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결심>

부산에 상륙한 16만 일본대군은 거칠 것이 없었다. 개전 20일 만에 서울을 차지했다. 조선 침공의 제1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군은 선조를 쫓아 평양성까지 입성했다. 가토 기요마사는 함경도까지 진출, 이제 조선 함락과 대륙으로의 진출이 눈 앞에 보였다.


일본군의 기본 전략은 4로병진, 육로 세 군데와 남서해안 해로를 통해 동시 진격하는 것이 그들의 기본 전략이었다. 그런데 해로에서 막히고 말았다.
이순신의 조선수군이 일본수군을 막아선 것이다.

 

일본수군은 첫 싸움 거제 옥포에서부터 합포(마산) 적진포(경남 고성)등에서 패전했다. 거북선이 처음 등장한 경남 사천의 선진 해전에서도 패전했다. 연이은 해전의 패전,
일본군 보급에 문제가 생겼다.


일본 학자의 연구에 의하면 당시 일본 배 한척에 곡식을 가득 실으면 200석을 실을 수 있었다.
200석이면 평양의 고니시 유키나가군이 사흘을 먹을 수 있는 양이었다. 열 척만 올라가면 30일, 백 척만 올라가면 300일을 먹을 수 있는 식량과 화약을 보급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뱃길이 막힌 것이다. 하는 수 없이 부산에서 육로를 통해 보급해야 했다. 그런데 배 한 척 분의 식량 200석을 말에 실을려면 말이 500마리가 필요했다. 말 한 마리에 4명의 군사가 필요했다. 이 무렵 조선 각지에서 의병들이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또 문제가 있었다. 부산에서 평양까지 뱃길로 가면 보름 정도면 충분했지만 육로로 가자면 당시의 도로 사정으로 두 달 이상 걸렸다. 그 두 달 동안 싣고 가는 군량미는 보급단이 다 먹어치웠다. 평양의 고니시 유키나가군이 버틸 수 없었다, 이 보고를 받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특명을 내렸다. `
`일본 장수 3명이 함께 이순신을 먼저 처리하라!`

 

<학의 날개를 넓게 펼치고>

이 특명에 따라 진해에 일본 장수 셋이 모였다. 와키자카 야스하루와 구키 요시타카, 그리고 가토 요시아키였다.


특히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용인전투에서 1500명으로 조선군 6만을 물리친 용장이었다. 그는 다른 장수들과의 합동작전을 거부한 채 자신의 함대 70여 척을 먼저 이끌고 출동, 견내량 건너 거제도 북쪽에 도착했다. 바로 이들이 김천손 눈에 띄었던 것이다.


이순신은 전 함대를 이끌고 견내량으로 나아갔다. 거제와 통영 사이의 좁은 바닷길, 지금의 거제대교가 놓이 그곳이었다. 이순신은 함대를 양쪽으로 나누어 섬 뒤쪽에 매복 시킨 다음 우리 판옥선 4,5척을 보내 적을 선제공격했다. 흥분한 일본 함대가 30여 리를 쫓아왔다.


적 함대가 다가오자 이순신 대장선에서 신기전이 올랐다. 매복해 있던 조선 함대가 넓게 날개를 펼쳤다.  그 유명한 학익진이었다. 반원형의 조선 함대 안에 일본 함대가 갇혔다. 조선 수군은 각종 총통을 발사했다.


당시 일본군의 주력 무기는 개인화기 조총, 그러나 조선 판옥선에는 16개에서 20개의 총통, 즉 대형함포가 장착돼 있었다. 최대 사거리 1.6킬로미터에 이르는 천자총통부터 지자총총 현자총통등이 대장군전과 단석, 조란탄을 뿜어냈다.

 

배의 모양이 첨저형이라 회전반경이 넓은 일본의 아다케부네(안택선)등은 조선 수군의 포망을 쉽사리 벗어나지 못했다. 조선 수군의 포격전 앞에 일본 수군은 속수무책이었다.
한산도 앞바다의 이 해전에서 왜선 59척이 격침당했고 9천 여명의 일본군이 전사했다.

 

왜장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간신히 거제도로 도망 가서 뗏목을 만들어 타고 부산으로 달아났다고 전해진다.
이때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먹을 게 없어서 무인도에서 미역과 김을 뜯어 먹기도 했다. 그런데도 일본의 와키자가 야스하루 후손들은 일년에 하루 밥 대신 미역과 김만 먹는다고 한다.


그들의 선조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미역과 김만 먹으면서도 열심히 싸운 것을 기념하는 이벤트라고 했다. 그 후손들에게 사실을 말해주었으나 전혀 믿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학익진, 이순신이 저작권자인가?>

많은 학자들이 한산대첩으로 해전의 개념이 바뀌었다고 한다. 이전까지의 해전들은 대부분이 단병접전이었다.


즉 서로에게 포를 쏜 다음 갑판 위로 올라가서 백병전으로 승부를 결정지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한산해전에서 철저하게 포격전을 견지했다. 일렬 대형으로 적과 맞붙어 포격하고 배를 붙여 싸우는 방식 대신, 함대를 이용하여 진법을 짜고 우리의 장점인 포격전을펼친 것이다.

 

이를 두고 학익진이라 이름했다. 그렇다면 학익진은 이순신의 순수 창작물인가? 이미 육전에서는 고대 로마때부터 쓰던 전법이었다.


육지에서의 학익진, 일단 적을 만나면 우리 부대를 볼록하게 가운데가 앞으로 나간 형상으로 진을 짰다. 그 가운데는 가장 약한 부대를 편성했다.


좌우로는 강력한 기마병을 배치했다. 전투가 벌어져 우리 진영의 한가운데가 뒤로 밀려날 때 양 옆에서 적을 포위 공격하던 전법이 바로 학익진이었다.
한산대첩의 학익진은 이순신이 처음 만든 것이 아니라 육지의 전법을 이순신이 바다에 처음 적용했던 것이다. 당시 다른 장수들도 학익진의 존재는 다 알고 있었다.

 

다른 장수들은 알고 있는데 그쳤고 이순신은 이를 실제로 실행해냈던 것이다. 이것이 이순신과 다른 장수들의 차이점이었다.

 

<한산대첩의 진정한 주역은 누구인가!>

학익진은 위험천만한 작전이었다. 적을 포위한 학익진이 한군데만 뚫려도 역습을 당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조선 수군은 전투가 끝날 때까지 그 대형을 그대로 유지했다.


흔들리는 바다 위에서 노를 젓는 무동력선, 장군이 원하는 간격과 원하는 타이밍을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의 신호도 깃발 신호가 전부였다. 대장선의 신호깃발에 따라 5개 대형의 부대가 일사불란하게 나아가걱나 물러나기를 거듭했다.


한산대첩 당시 조선 수군은 이순신의 전라좌수군, 원균의 경상우수군, 그리고 이억기의 전라우수군으로 50여 척의 판옥선에 군사 만 여명이었다. 경상도 사투리 쓰는 군사 전라도 사투리 쓰는 군사 가끔가다 충청도 사투리 쓰는 군사, 아직은 서로가 화학적으로 결합되지 못했다.


이억기의 전라우수군은 한산대첩 며칠 전에 합류했다. 제대로 된 합동훈련도 충분치 않았다.
그런데도 이들은 한 치의 빈틈도 없이 학익진을 구사해냈다. 이 비결을 역사학자나 군사학자들이 연구해보면 좋겠다.


한산대첩 전, 연합함대를 꾸린 이순신과 원균은 걸핏하면 지휘권 문제로 다퉜다.
둘다 같은 계급인 수군절도사였기 때문이다. 그 아래 휘하 장수들도 편이 갈릴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의 지휘관이 누구냐에 따라 입장이 다를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1만여 조선수군은 공동의 적 앞에서 일치단결, 학익진을 훌륭하게 수행했고 마침내 대첩을 일궜다. 420여 년 전의 이름 없는 조선 수군 중의 하나가 오늘의 우리를 보면 무슨 이야기를 할지 민망하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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