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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먹으러 왔습니다
 
임일태 전 한국해양대 겸임교수   기사입력  2020/02/25 [17:28]
▲ 임일태 전 한국해양대 겸임교수    

이곳에 무엇 하러 왔느냐고 물었을 때 딱히 생각나는 말이 떠오르지 않아 "밥 먹으러 왔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모두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수강 신청한 노인복지관 컴퓨터 고급반의 첫날 첫 수업, 열 시 반부터 열두 시 까지, 두 번째 강의로 편성되어있었다. 초행이라 길이 서툴고, 첫 수업부터 시간을 정확하게 맞추어 입실하면 인색한 사람으로 보일까싶기도해서 한 시간쯤 먼저 도착했다. 강의실과 주변을 구경하며 시간을 보내다 십 분 전에 입실할 요량이었다. 강의실 주변을 서성거리는데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노인복지관 컴퓨터 고급반 강사라며 "혹시 일찍 오셨다면 지금 강의실에 입실하셔도 됩니다."라고 말했다. 마치 주변을 어슬렁거리다 들킨 것 같아 당황해하면서 강의실에 들어섰다. 강의실을 꽉 메운 수강생들이 강의에 열중하다 일제히 나를 쳐다보았다. 젊은 여자 강사는 앞 시간의 수업이 없어 강의실이 비어있기 때문에 조금 일찍 시작하여 일찍 마치는 것이 점심시간에 식당에 줄을 서는데 유리하다고 수강생들의 요청으로 수 년 전부터 그렇게 하고 있다고 했다. 이번에 처음 등록한 수강생이 나 혼자이고 시간 변경을 모를 것 같아 전화 했다고 한다. 비어있는 한 자리에 컴퓨터를 배정받고 나자 자기소개를 하란다. 다른 수강생은 모두 몇 년째 같이한 사람이라 나만 소개하면 된단다. 얼떨결에 앞으로 나갔다. 사는 곳과 나이와 이름을 소개하면 될 것 같다.

 

온양 읍에 칠십 평 아파트에 살고 있다고 내 이름을 소개하자 어떤 이는 첫날부터 아파트 평수 자랑하러 왔느냐고 못마땅한 표정이다. 그래도 젊어도 좋겠다고 부럽다는 표정을 짓는 이도 많다. 요즘은 나이를 몇 학년 몇 반이라 표현하는 것보다 아파트 몇 평에 산다고 하는 것이 유행이다. 늙는다는 것을 아파트 평수를 늘이는 것으로 자랑하면 조금은 위로가 되지 싶다. 대부분의 수강생들이 왕초보, 초급, 중급을 거쳐 고급반에 들어왔는데 처음부터 고급반에 수강한 이유를 물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컴퓨터를 한 사십년 했기에 가장 쉬운 과목일 것 같아 신청했다고 했다. 사십 년이나 컴퓨터를 사용했으면 배울 것이 없을 것 같은데 왜 배우러왔느냐는 말에 얼떨결에 노인복지관이 밥값도 싸고 맛있다고 해서 밥 먹으러 왔다고 했다.  그렇다 밥 먹으러 온 것은 맞는 말이다. 두 해 전 퇴직을 하자 우울증에 걸릴 것만 같았다. 아마 아직 우울증을 앓고 있는 지도 모른다. 취미로 이것저것 해보았지만 마음을 안정시키지는 못했다. 직장에 다닐 때는 배우고 싶은 것도 많았는데 막상 시간이 많아지자 어떤 것이 하고 싶었는지 생각조차 가물가물하다. 예상했던 수입도 경기에 영향을 받아 턱없이 줄어들었다. 취미로 해볼까 생각했던 강의는 장비 구입비용이 비싸 엄두도 못 낼 판이다. 무료 강의를 찾아 수강을 해보지만 새삼스레 배운다는 것은 스트레스만 더할 뿐이었다. `일식님`, `이식씨`, `삼식이세끼`란 우스갯말이 가슴을 짓눌렀다.

 

가족과 함께하는 오붓한 점심 식사는 서먹서먹함을 넘어 고통이었다. 직장의 구내식당 밥이 맛이 없다고 불평하던 시절이 그립다. 이젠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어볼 수나 있을지. 그리움이 몰려온다. 친구들 보다 오랫동안 직장생활을 한다고, 내 직장에 놀러오면 언제든지 구내식당에서 점심 대접을 하겠다고 은근히 자랑 했던 시절도 있었는데 다시 직장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은 그 친구나 마찬가지다. 열한 시 삼십 분 노인복지관 식당 앞, 천 원짜리 파란색 식권을 들고, 길고 구부정한 밥줄에 합류한다. 먼저 온 사람들로 식당은 초만원이다. 식당에 밥을 퍼는 아주머니께 사정하여 밥을 조금 더 얻은 것이 이렇게 기분이 좋을 줄이야. 식판을 들고 빈자리를 찾아 두리번거리다 빈자리를 찾아 앉아 동병상린의 식구들과 같이 밥을 먹는다. 영원히 올 수 없을 것만 같던 구내식당에 온 것이다. 북적거리는 분위기에 다시 젊음을 찾은 것 같다. 이제 부터는 나도 `이식씨`가 되는 것이다. `삼식이세끼`도 면하고 활기도 찾을 것이다. 머릿속의 우중충한 구름이 걷히고 차츰 맑은 하늘이 보일 것만 같다. 밥 먹으러 오기를 잘했다고 행복하게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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