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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훈 시인   기사입력  2020/08/05 [16:00]

돌본다는 건 심장에 깊어지는 못이었다 사월이 개화 순서를 놓치면 식기들이 바닥에 떨어지고, 먼 촌수로부터 가까운 촌수에게로 찾아오는 문상에게 엄마는 다음 밥상을 차린다

 

꽃무덤 하나를 두고 서로가 서로를 미루던 병동은 그 긴 추위를 어떻게 견뎌 왔을까

 

기저귀 속에서 한 번도 만개해 본 적 없던
외할머니가 더는 일어날 수 없게 되었을 때
나는 살아서도 일어설 수 없는 봄과
삶을 돌본 적 없으면 끝도 돌보지 않는 진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심박이 떨어질수록 혼자 남겨질 식사와 혼자 남겨질 가족사는 끝내야만 옳은 것이 되어 갔다

 

요양,이란 아무도 돌보지 않는다는 뜻
지긋지긋한 오한보다 더 지긋지긋한 것이 봄이라고, 밥상머리는 차마 말하지 못했다. 만개한 벚꽃이 거리에 쏟아지듯, 쏟긴 물컵은 밥상의 비린내만 걸레질한다 돌볼 일 없는 꽃놀이로 어질러진 침상들이 더 두꺼운 혼자가 되어 간다

 

입맛이 없어져도
살 사람도 죽을 사람도
모두 자기가 흩날릴 거라곤 말하지 않았다

 


 

 

▲ 류성훈 시인  

우리는 미명(美名)을 짓는 일에 무서우리만큼 능하다. 변명에 대한 변명, 그것은 가령 ‘요양 병원’ 같은 것이다. 그곳은 숨이 붙은 부모를 버리는 곳이며 거기서 누구든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거란 걸 안다. 거기엔 ‘남은 삶들을 위해’ 라는 불편한 미명이 있다. 아픔을 고치는 곳이란 의미의 병원이 사실 가장 사람이 많이 죽는 곳인 것처럼, 이제와 우리는 병원의 의미와 요양의 의미 중 어느 것도 고치긴 힘들 것이다.

 

그것은 삶의 뒤에 혹은 죽음의 뒤에도 숨어 있을 테니까. 떠난 자는 탓하지 않고, 미명은 늘 산 자의 몫이다. 아무도 돌보지 않던 삶을 죽음이 그 끝이나마 지키게 하는 모습을 보면서, 죽음은 삶의 반댓말이 아니라 어떤 미명이 아닐까. 언제 한 번 이곳에 온 적도 없었다는 듯 사라진 그녀를 변명처럼 추억하는 나는, 어쩌면 이 모든 걸 회상의 형태로 지워나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최소한 내게 있어 시는 대상을 그려나가는 의미의 방식이 아니라 지워나가는 추억의 방식으로서 불완전하게 곁에 있는 어떤 것이다. 구차한 미명과 면목 없는 변명 사이에서, 그나마 전자보다는 후자에 가깝고자 하는 고백 같은 것. 그게 과거에 대한 것이든 미래에 대한 것이든 우리는 미명으로 살고 죽음으로 변명할 테니. 태어나고 사라지는 수많은 시선 속에서, 개개의 삶을 어떻게 변명할 것인지 나는 아직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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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0/08/05 [16:00]   ⓒ 울산광역매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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