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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운드 미러
 
강주 시인   기사입력  2020/12/03 [16:19]

일곱 명의 소년들이 돌층계에 앉아 있다. 생중계되는 빛의 중얼거림. 털모자를 벗는 친구와 털모자를 쓰는 친구 사이에 마침표를 찍는다. 어떤 친구의 질문은 굳게 닫혀 있다. 질문을 열면 세계 각국은 친구로 쏟아질까. 단단한 문은 외면이 쉽고 한 소년이 일어선다. 영수증을 쓰레기통에 버린다. 햄버거 다섯 개의 가격을 찢는다. 다섯 개가 일곱 개가 되지 않는다. 무릎을 모으고 있는 소년의 얼굴이 검다. 컨베이어벨트를 지나간다. 빌딩에서 춤추는 홀로그램과 소녀시대. 검은 소년은 없다. 컨베이어벨트는 포기를 모른다. 인종과 국적을 섞은 음악의 공유지와 미세먼지. 브라운관과 어항을 섞으면 어느 것은 예술이다. 21세기는 항상 지난다. 지날 수밖에 없다. 일곱 명의 소녀들이 돌층계에 앉아 있다. 이것은 하나의 퍼포먼스. 이것은 하나의 확신. 개찰구를 벗어난다. 광장으로 모인 사람들이 사람들의 통로가 되고 소년이 듣고 싶은 음악은 음악의 위치였다.

 


 

 

 

▲ 강주 시인  

21세기는 홀로그램이 언어를 대체하는 시뮬레이션의 시대다. 이제 존재를 기술하는 주요한 방식은 증언이 아니라 알고리즘화된 이미지들이다. `인간`의 의미는 더 이상 사람들의 대화와 기술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알고리즘에 의해 편집되고 유통되는 홀로그램으로 전락한다. 컨베이어벨트처럼, 끝없이 이미지가 흘러나오는 홀로그램 입간판은 이 시대가 존재를 재현하는 방식이다. 이때 자유로운 연상으로 전개되는 시인의 환유적 형식은 이러한 이미지의 산란과 닮아 있다.


이 작품에는 인간성을 향한 갈증 또한 깃들어 있다. 생중계되는 빛 아래에서 `어떤 친구`는 침묵하고, 홀로그램 소녀 이면에서 `검은 소년`은 감춰진다. 즉 홀로그램 인간이 인간을 대신한다. 예술은 이러한 은폐를 드러내는 계기이자 어우러짐의 사건이다. 서로 다른 인종과 국적을 가진 사람이 뒤섞이듯, 혹은 브라운관과 어항이 데페이즈망을 이루듯, 낯선 두 존재가 서로 결합하는 사건을 `예술`이라고 부른다. 수많은 사람이 나란히 선 광장의 상상력은 수많은 사람의 마음에 스며드는 음악의 상상력으로 옮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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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0/12/03 [16:19]   ⓒ 울산광역매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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