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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장의 묵화
기사입력  2021/01/14 [16:20]   허향숙 시인

할아버지 할머니 멀리 북천에 떠나보내고
홀로 덩그러니 남겨진
내 고향 옥호리 기와집 한 채
곳간이며 장독대며 사랑채며
동백기름 바른 머리칼처럼 반짝였는데 
책갈피에 끼워 놓았던 몇 해 전 나뭇잎처럼 푸석해지더니
끝내는 박제된 채로 서서히 허물어져 간다

 

야화처럼 피었다 지던 별꽃들조차
우물이 마르고 나무가 시들시들 앓다가 바닥에 몸 누인 뒤로는
더 이상 찾아오지 않는다

 

풀씨들 날아와
낡은 지붕과
무너진 흙담과
꺼진 마당에 터를 잡는다

 

캄캄하게 고인 시간의 웅덩이에 갇혀
야위어가고 메말라 가다가  
파필의 흔적으로 남아 있는

 


 

 

 

▲ 허향숙  시인     © 울산광역매일

방학 때면 꼭 가곤 했던 아스라이 먼 기억 속의 그곳.
깊은 밤이면 어둠을 깨고 꺼내 오신 장광의 샤베트 같은 홍시. 할머니의 뚝뚝한 속정. 자상한 할아버지의 허리춤 쌈지돈. 충남 당진군 순성면 옥호리 513번지.
태초의 것들만 웅성거리는 곳. 그리움은 저 홀로 무성히 살아내고 있다.
지금 내가 순수함으로 견디는 것도 "야위어가고 메말라 가"는 시간들을 가슴에 오래 품고 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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