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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역 에세이>답압(踏壓)
 
임일태 전 한국해양대 겸임교수   기사입력  2021/01/28 [17:00]
▲임일태 전 한국해양대 겸임교수


겨울바람이 세찰수록 보리의 뿌리가 얼지 않도록 밟아준다. 겨울을 버틴 보리는 봄이 되어도 다른 보리에 비해 앉은뱅이이고 볼품이 없다. 세찬 바람과 폭우에 다른 보리가 넘어질 때, 불쌍하게도 넘어질 높이가 없다. 그러나 때가되면 싹은 튼실하고 열매가 많이 달린다.


 중학교 일학년 봄이었다. 보리가 익어갈수록 어머니의 얼굴색은 자꾸만 누렇게 변하고 부어갔다. 보리타작이 끝나고 늦은 모심기를 하던 날 논에서 쓰러진 어머니는 우리 육남매의 곁을 영영 떠났다.


 봉제사를 위해서 종부자리를 비울 수 없다는 친척들의 성화에 아버지는 새어머니를 맞았다. 중학교 삼학년이 되면서 아버지와 새어머니는 나의 진학문제로 자주 다투었다. 새어머니의 두고 온 딸은 중학교 이학년이었다. 공부를 꽤 잘한다고 했다. 새어머니는 공부 잘하는 딸 뒷바라지라도 할 수 있을까하는 기대로 재혼을 했단다. 나를 고등학교 진학시키는 조건으로 당신의 딸도 고등학교를 보내주어야만 한다고 했다.


 아버지는 딸과 아들에 대하여 차별이 무척 심했다. 누나 둘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농사일을 돕는 처지였지만 아들인 내가 고등학교를 가지 못할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당시에 집안 사정이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고등학교에 두 명을 보낼 수 없는 처지도 아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두 누나들을 초등학교 밖에 보내지 않은 것이 죄가 되어 새어머니의 두고 온 딸까지 고등학교를 보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새어머니도 두고 온 딸이 재주가 너무 아깝다는 생각으로 뜻을 굽히지 않았다.


  아버지의 고민은 깊어만 갔다. 뾰족한 방법이 없어 보였다.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나 밖에 없다고 생각을 했다. 결국 아버지와 새어머니는 타협점을 찾았다. 나와 새어머니의 딸, 둘 다 고등학교는 진학시키지 않는 것으로 최종 합의했다.


  중학교 삼학년 겨울 방학 시작과 동시에 무작정 집을 나왔다. 겨울만 잘 버텨내면 따뜻한 봄은 올 것이라고 믿었다. 봄에는 어떤 방법이든지 스스로 진학하겠다는 생각으로 견뎌내고 있었다. 겨울 내내 죽은 듯이 움츠리고 있는 보리처럼. 때를 기다리리라. 십년이 걸리더라도 꼭 해내리라는 결심에는 변함이 없었다.


  진학 준비만 삼년을 하고 있는데 동생이 중학교 졸업반이 되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없는 운명을 한탄하여 동생이 방황을 했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나는 진학을 포기하고 대신에 동생을 고등학교에 진학시켰다. 그러면 누구도 반대를 하지 못할 것이다. 누나들도, 아버지도, 새어머니도. 이 방법만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으리라.


 동생과 같이 자취를 시작했다. 동생의 책으로 검정고시 준비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이것뿐이었다. 동생은 우리 육남매 중 최초의 고등학생이 되었다.


 하지만 우리의 자취방은 고향의 겨울 보리밭이었다. 세찬 바람이 불고 서릿발이 더욱 높게 돋는 혹독한 겨울의 연속이었다. 봄은 영영 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럴수록 세상과 운명을 향해 더욱 힘차게 밟고 꾹꾹 눌렀다.


 기나긴 겨울은 가고 봄이 왔다. 세파에 시달리고 얼어서 죽은 줄만 알았던 보리는 상처자국마다 움이 돋고 자랐다. 볼품없는 난장이 이지만 튼실한 열매가 맺혔다.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나간 섣달그믐. 나는 텃밭에 심어놓은 겨울 보리를 밟고 있다. 지나간 추억도 함께 밟고 있다. 아내는 설 준비로 부산하다.


설을 쐬러 동생네 가족이 왔다. “교수님이 겨울방학 내내 보리만 밟습니까?” 동생이 들고 있는 신문에는 표준연구소 올해의 명장으로 동생이 뽑혔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설 알 보리 밟아주면 떡 얻어먹는다는 말이 있질 않은가” “아버지는 보리농사 하나는 참 지었는데….” 동생의 말에 “자식농사도 이만하면 참 잘 지었지”하면서 동생을 툭 친다. 안채에서 아내가 떡 먹으러 오라고 소리친다. 둘이 쳐다보면서 씁쓰레하게 웃는다. 묘한 웃음 가운데로 겨울바람 한 움큼이 빠르게 지나간다. 전 한국해양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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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1/01/28 [17:00]   ⓒ 울산광역매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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