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다보면
어느덧
한 권의 책이 되는
비어있는 공책
처음 만났던 기억은
칸칸이 네모 방
못자리 공책이었지
연필에 힘을 실어
글씨를 다져나가면
침 묻은 연필심에
씨앗이 움터
나의 시는
그렇게 파종이 되었다
안으로 새카맣게 타들어간
속심지 몽당연필
퀭하게 닳도록
몽그라져 할근거려도
햇발에 잘 표백된 칼칼함으로
언제든 등을 내어주고
업어주던 공책
페이지를 넘기면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어
시를 쓰고 싶은 날
파피루스 풀내음 진한
나일 강변으로 떠나볼까
공책을 펼치면
연필은 여전히 가슴 설레인다
(시작노트)
비어 있던 공책은 겉으로 봐서는 그야말로 아무데도 쓸모가 없어 보인다. 이것을 일상 한가운데에 놓고 보았을 때도 마찬가지다. 거기에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기 때문에 어떠한 것도 읽을 수 없으며, 따라서 정보로서의 가치는 전무하기에 그 효용 가치는 그야말로 제로(0)에 가깝다. 하지만 쓸모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공책은 ‘아직’ 쓰여 있지 않았기에 ‘이미’ 쓰여 있는 것이다. 왜 그럴까? 가만히 살펴보면, “씨앗” “파종”과 같이 농사를 연상케 하는 시어들이 뿌려져 있기 때문이다. 나의 내밀한 텃밭, 즉 공책에는 이미 그 열매인 시어의 씨앗들이 심어져 있다. 한겨울에는 아무것도 자라지 않아서 황량하게 보였던 땅도 봄이 오면 그동안 품었던 생명의 싹을 틔우듯이, 그 순환과 반복이야말로 시에 내포된 ‘섭리’인 것이다.
문영애 시인
밀양 출생
2015년 계간 《시산맥》에서 작품 활동시작
2019년 《한국미소문학》등단
2020년 《시산맥》감성기획시선 시집 공모 당선
시집『바다의 테라피스트』
음악교사에 이어 음악치료,
원예치료 등 테라피에 관한 학문 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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