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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흐르는 아침> 페르세포네의 동굴
 
이인주 시인   기사입력  2021/05/17 [17:23]

쉿, 

세상의 온갖 상한 과일들은 여기로 모인다

한 개의 항아리 안으로

귀퉁이 찍힌, 껍질 벗겨져 짓무른, 벌레에 먹힌

벌건 흉터자국 알몸에 새긴 채

술항아리 안으로 가둬진다

그리고 상처 입은 생살을 진득이 절여 삭힌다

켜켜로 재인 몸에서 흘러나온

저것은 고름이야

그들은 흘러온 발자취를 감추기 위해

속살 키운 꽃을 떨구고 잎새 가파른 엽맥을 지운다

취기 얼얼한 방 속에서 배젖들은 거듭거듭 육탈당한다

씨눈의 촉광 흐려진 초승달이 넌지시 실눈 뜨고 엿보는 밤

입술 문드러진 그들은 수화手話하는 나무가 되고

출렁출렁 숲이 되어 자란다

항아리 속에서 한 세상이 다 익도록

가장 농밀한 숙성의 때를 기다린다

통풍구 넘나드는 풍문을 타고

발향은 담장 밖까지 진동하는 법

온갖 상한 과일들은 페르세포네의 동굴 안에서

신생을 꿈꾼다

수 그루의 나무가 쌓인 항아리 속

무덤으로부터 우러나는 주정酒精의 액

 


 

 

▲ 이인주 시인     © 울산광역매일

<시작노트>

 

 페르세포네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저승의 여신으로 주신酒神 제우스와 농업의 여신 데메테르의 딸이다. 그녀는 들판에서 님프들과 꽃을 따던 중 명계冥界의 왕 하데스에게 납치되어 명부로 끌려가 하데스의 아내가 되었다. 데메테르가 딸이 납치된 사실을 알고 제우스에게 항의하여 하데스에게 페르세포네를 돌려줄 것을 요구했는데, 하데스가 지상으로 되돌려 보내기 직전 페르세포네에게 지하세계의 음식(석류)을 먹게 만들어 페르세포네는 지상과 지하세계를 오가며 살게 되었다. 이 시에서 ‘페르세포네의 동굴’은 “세상의 온갖 상한 과일들”이 모여드는 ‘죽음’의 공간이다‘페르세포네의 동굴’은 ‘죽음’의 공간이 아니라 ‘신생/부활’의 공간이 된다. ‘죽음’에서 신생新生의 가능성을 발견해내는 시선, 이것이야말로 일상적인 시선이 도달하지 못하는 새로운 감각이다.  

 

이인주

 

경북 칠곡 출생

2003년 불교신문신춘문예 당선

2006년 『서정시학』신인상

시집 『초충도』발간(2017년 세종도서 문학나눔 선정) 『백매도』      

제15회 신라문학대상, 제8회 평사리문학대상               

제2회 목포문학상 수상

대구 정화중학교, 정화여고 교사 역임

2021년 상상인 시집창작지원금 수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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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1/05/17 [17:23]   ⓒ 울산광역매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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