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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역 에세이> 섣달 그믐날
 
최성보 수필가   기사입력  2022/01/26 [18:51]
▲ 최성보 수필가     © 울산광역매일

 며칠 있으면 설날이다. 설날이 추석과 더불어 우리의 최고 명절이다. 양력 달력을 걸고 호랑이 해가 왔다고 요란하게 문자로 카톡으로 새해 인사는 다 했지만 내 마음 속엔 아직 진짜 호랑이가 오지 않은 듯하다. 조상님께도 아직 새해 인사를 하지 않았다. 진짜 설날이 다가 오니 대가족으로 시끌벅적 했던 어릴 때 우리 집 모습이 생각나고 그립다. 

 

 섣달 그믐 날이면 지금은 아파트 숲이 들어서고 도시가 되어 버렸지만 경주 북천 강가 한적한 아카시아 숲속 우리 초가집에도 아침부터 설 차례 준비에 분주했다. 우리들은 마당에 멍석을 깔고 제사상에 쓰는 놋그릇을 모두 꺼내 깨끗이 닦는 일부터 시작한다. 기왓장 조각을 부드럽게 빻아 가루를 만들어 `쟁깨미`라고 불렀는데 볏짚에 묻혀서 놋그릇 안팎을 문질러 닦으면 우중충했던 녹이나 떼가 깨끗이 지워지고 새 그릇처럼 반짝반짝 광이 난다. 오후 햇살에 닦은 놋그릇에 반짝 반사되어 눈이 시리고 부딪치는 소리조차 `쨍`하며 경쾌하다. 

 

 제사에 쓰는 제수들은 모두 아버지께서 직접 장을 보시고 장만 하신다. 방안에서는 며칠 전부터 분주히 시장에서 준비하여 우리들이 떼어 먹을까봐 다락방에 숨겨 놓았던 제수들을 꺼내 장만하신다고 도마질 소리가 요란하다. 평생 부엌일이나 음식 만드는 일을 하시는 것은 본 적이 없지만 조상님께 올릴 제수를 다듬는 일은 항상 아버지 몫이었다. 제사에 쓰는 돔배기나 조기는 머리와 꼬리를 잘라 내고 산적을 만드는 모양이 정해져 있으니 어머니나 우리에게 맡기지 않는다. 알밤을 깎는 모양도 둥글지 않고 각이 지고 지금 내가 깎아도 그 모양이 나오지 않는다.

 

 우리들은 옹기종기 둘러 앉아 칼질에서 튕겨 나오는 생선 꽁다리며 부스러기를 낼름낼름 주어 먹으며 설만의 특수를 누린다. 어머니는 하루 종일 벽에 구멍이 쑹쑹 뚫어져 눈발이 날려들어 오는 부엌에서 찬바람을 참으며 종일 나무 가지 땔감을 지펴 지짐을 굽고 조청을 고아 솥뚜껑 엎어 놓고 쌀강정 콩강정 좁쌀강정 깨강정 만드신다고 분주하다. 그때는 제수 음식이나 과자들을 모두 집에서 만들어 먹었다. 바람이라도 세게 부는 날이면 연기가 역류하여 온통 눈물범벅으로 설음식을 장만해야 했다.

 

우리들은 안방에서 부엌 쪽문을 열고 마치 어미가 물고 오는 서로 먹이를 달라고 짹짹거리며 입 벌리는 제비 새끼마냥 강정 등 설 음식을 잘라내고 남는 짜투리를 한 조각이라도 얻어먹으려고 다투어 손을 내밀고 있다. 우리는 저녁에 쇠죽을 끓여 퍼주고 난 가마솥에 우물물을 길어다 부어 뒷불에 따끈하게 끓으면 솥에 들어가 한 해 동안 묵은 때를 말끔히 벗겨내는 목욕 행사를 했다. 겨울에는 섣달 그믐날이 목욕 하는 날이다.

 

암소와 송아지가 다정히 앉아 멍하니 자기들의 밥을 끓이는 솥에서 목욕하는 나를 신기한 듯 멍하니 쳐다보던 모습이 생각난다. 잠 잘 시간이 되면 어머니는 소가 잠자는 외양간이나 장독대 등 우리집 곳곳에 불을 밝히고 방 윗목엔 상을 차리고 쌀 담은 그릇에 촛불을 꽂고 불을 밝히고 날을 샜다. 하나 밖에 없는 좁은 방에는 이불을 펴고 이불 밑에 일곱 식구 모두가 오글오글 다리를 뻗어 서로 끼우고 잠을 잤다. 문풍지를 붙였지만 문 틈 사이에 찬바람이 얼굴을 문쪽에 누우면 스쳐 이불을 서로 많이 덮으려 당기다가 발로 차고 이불 밑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어머니는 그믐 날 저녁이면 밤에 귀신이 와서 신발을 신어보고 신발이 맞으면 그 신발의 주인인 애를 데리고 간다 하시며 신발을 모두 방안 윗목에 모아 놓고 문고리에는 채(술 찌꺼끼등을 걸러내는 도구)를 걸어 두고 안에는 문고리를 걸어 잠금다. 채를 걸어두면 귀신이 방문을 열지 못한다고 했다. 밤새 바람 소리에 문고리에 걸린 채가 연신 투닥거리는 소리가 귀신이 온 줄 알고 우리들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무서운 밤을 보내야 했다.

 

 또 섣달 그믐날 밤은 잠이 들면 눈썹이 하얗게 쇤다고 하여 그것을 믿고 이야기도 하고 장난도 치면서 잠이 들지 않으려고 애를 쓰다가 언제 잠이 들었는지 깜빡 잠이 들어 버렸다가 아침에 화들짝 놀라 일어나 얼른 거울을 보며 다투어 눈썹을 확인하던 일이 생각난다. 아버지는 돌아가신지 딱 20년이 되었고 그나마 어머니라도 계셔서 중심이 되어 모이곤 했는데 어머니마저 돌아가신지 벌써 4년이 되었다.

 

이젠 장남인 내가 그때의 아버지 어머니 역할을 하고 있으니 세월이 많이도 흘렀다. 형제들도 모두 각자 자기들 가정을 꾸리고 섣달 그믐을 맞고 설날을 지내고 살고 있지만 우리들만의 그 때의 섣달그믐 날을 잊어 버렸을까. 섣달 그믐날, 이젠 우리 아이들도 모두 커서 나가고 우리 부부 둘만 설인지 명절인지 느끼지 못하고 요란한 설빔도 없이 조용히 침대에서 휴대폰이나 보며, 우리 오남매 가족들이 한 집에서 그렇게 북적이던 경주 북천 강가 옛집 어린 시절 우리집 모습, 설빔을 분주히 준비하시던 아버지 어머니 모습이 아련한 기억으로 돌아가 본다. 그 때가 우리들이 진짜 사는 모습이었다.

 

 아, 오늘따라 아버지 어머니가 사무치게 보고 싶다. 그리운 섣달 그믐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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