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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기획-서북미 문인협회> 미국에서의 배움을 준 나의 선생님들
 
장헌숙 번역가   기사입력  2024/01/29 [17:27]

▲ 장헌숙 번역가  © 울산광역매일

 어느 날, 나는 여고 교복을 사복으로 갈아입고 미국행 비행기를 탔었다. 그때가 1968년 2월7일 이었다.

 

 그해 4월 초 나는 영어를 하나도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미국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그날 수업 도중에 방송실에서 무어라 방송을 했는데 나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방송이 끝나자마자 선생님과 아이들이 책과 소지품들을 챙기더니 교실을 나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나는 어리둥절해 하면서 내 자리에 그냥 앉아있었는데 어떤 아이가 오더니 let’s go그랬다.  let’s 는 알아듣지 못했지만 go는 알아들었다. 학교 빌딩 밖으로 나왔을 땐 학교버스들이 이미 와있었고 아이들은 학교버스를 탑승하고 있었다. 내가 타는 버스를 찾아서 가니 수잔(Susan Carroll)이 버스에 이미 타고 있었고 나에게 오라는 손짓을 했다.  항상 그랬듯이 수잔은 자기 옆에 내 자리를 잡아놓고있었다. 버스 안에서 집에까지 가는 동안 수잔은 나에게 왜 학교가 수업을 중단하고 일찍 집에 가는지 얘기해 주었다. 내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천천히 얘기해 주었다. 

 

 킹 목사님이 암살을 이틀 전에 당했다고 했다. 킹 목사님은 침례교 목사님이었고 그는 흑인이었는데 인종 차별을 반대한 사람이었다고(Rev. King Jr. was a black Baptist minister and he was an activist who promoted civil rights for people of color.). 이 사람이 암살을 당하니까 흑인들이 Washington DC에서 폭동을 일으켰으며, 학교들은 모두 얼마간 휴강을 해야한다고 말이다. 

 

 이 모든 것이 낯설고 어쩌면 두려울 때도 있었다. 조금 지나자 좋은 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특히 남학생들의 여학생을 대하는 매너가 아주 맘에 들었다. 자신들도 아직 어린 십대들인데도 여학생한테 자리도 양보해주고 문에 들어갈 때도 꼭 여학생 먼저 들어가도록 문을 열어 주곤 했다. 한번은 내가 다음 교실에 들어 가려는데 어떤 남학생이 문을 열고 서있었다. 나는 무의식 중에 그 아이가 먼저 들어가기를 기다렸다. 한 30초쯤 지났을까 나는 문득 생각이 났다. 아! 내가 여학생이니 이 남학생이 내가 먼저 들어가기를 기다리는구나. 그래서 나는 그 아이 앞을 지나 쑥 교실로 들어가 버렸다. 그때 나는 Thank You라고 그 아이한테 했었어야 했다.  

 

 이렇게 수잔은 미국에서의 나의 진정한 첫 선생님이었다. 그 아이는 친절하게 영어뿐 아니라 미국 고등학교 규칙과 여러 가지를 가리켜 주었다. 교실에서는 선생님들에게 배우고 교실 밖에서는친구들에게서 많은 영어를 배웠다. 그 많은 영어증에서 내 귀에 자주 들어오는 말 몇개가 있었다. 그 말은 Thank You, Excuse Me, I am sorry, Please 이었다. 학생들도 선생님들도 이 말들을 대화 중에 많이 사용하고 있었다. 영어회화를 하는데 이 말들은 필수인 것 같았다. 방과 후 나 혼자 이 말들을 자연스럽게 될 때까지 소리내어 반복했다. 그리고 얼마가 지나니까 Thank you, Excuse Me, I am sorry, Please 가 나도 자연 스럽게 나왔다. 나는 그때 이 말들이 많이 필요한 때였다.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아 선생님과 동급생들에게 항상 물어보았으니까. 그때마다 나는 새로 배운 thank you, excuse me, I am sorry, please 를 써 먹었다. 그럴 때마다 선생님이나 아이들은 꼭 you’re welcome 아니면 it’s ok 했다. 나는 그때 내가 예의 바른 나라에 왔구나 생각했다.  

 

 선생님 그리고 동급생들 모두가 나한테 영어 뿐만 아니라 미국이란 곳에 대해서 배움을 주었다. 이런 현상은 내가 대학을 가서도 또 대학원에서도 계속되었다. 그러나 대학은 고등학교 하고는 달랐다. 영어가 부족하다고 봐주지도 않고 시험 볼 때 시간도 더 주지 않았다. 그리고 고등학교때는 없었던 논문 제출이 필수인 과목이 수두룩했다. 정말 나는 앞이 캄캄했다. 아니 대학에서 낙제할까 봐 무척 겁이 나 있었다. 그리고 내가 낙제라도 하면 미국인들이 한국사람들은 저렇게 공부도 못하고 머리도 나쁜거라 생각할까 봐 걱정이 되어서 학교에서 낙제만큼은 면 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공부했다. 나로 인해서 미국인들이 한국인들은 아주 모범적이고 공부도 잘하는 좋은 인상은 주지 못해도 그 반대의 인상을 주면 안되겠다는 마음으로 학업에 최선을 다했다. 다행히 나는 무사히 학업을 마칠 수 있었다.거기에는 교수님들의 배려 그리고 가르침이 있었다. 대학에서 만난 친구들의 도움도 종종 받았다. 특히 프로젝트를 같이 할 때 그들의 배려가 없었다면 나의 대학생활은 더 힘들었을 것이다.

 

 나는 대학 다니는 동안 계속해서 일을 했다. 물론 파트타임이었다. 아마 한국에선 이걸 알바라고 하는 것 같다. 물론 용돈을 벌어서 좋았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니 그 파트타임(Dunkin Donuts, McDonald, Department Stores, College laboratories) 일들을 하면서 나는 또 다른 미국에 대해서 그리고 다른 영어 사용법을 배우게 되었다. 이런 다양한배움은 나중에 대학을 마치고 직장인이 되었을 때 나에게 큰 재산이 되었다.

 

 지도 교수님의 조언과 배려로 나는 NRC 그리고 NASA 에서 나의 전공과목이었던 엔지니어의 일을 시작했다. NRC에는 잠깐 근무했고 NASA에서는 33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을 보내고 2019 년에 은퇴했다. NRC 에서도 그리고 NASA 에서도 내 주위에는 배울 것으로 가득차 있었다. 나는 NASA 에서 일하면서 배움이 가져다 주는 기쁨을 알게 되었다. 나에게 배움을 가져다 준 모든 그들은 나의 선생님들이었고 나는 그들에게 영원히 고마워할 것이다.

 


 

 

장헌숙(Ruth Chiang Carter) 약력

 

메릴랜드 대학교 원자력 공학 학사 및 석사

NASA Goddard Space Flight Center에서 항공우주 시스템 엔지니어로 근무

현재 NASA의 달 임무 페이로드인 차세대 달 역반사체에 대해 컨설팅 담당

제19회 뿌리문학신인상 번역부문 수상

(현) 서북미문인협회 회원

현재 와싱턴주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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