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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역 에세이> 편독(遍讀)의 즐거움
 
심재숙 시인 시산맥 회원   기사입력  2024/02/13 [17:20]

▲ 심재숙 시인 시산맥 회원  © 울산광역매일

 오늘도 걸었다. 낮의 길이가 좀 길어져서인지 늘 같은 시간, 같은 숲길이지만 느낌이 달라졌다. 집 근처에 숲이 있어서 자주 걷는다. 파란 하늘에는 솜털 같은 구름이 촘촘하게 깔렸다. 길옆에 늘어선 이팝나무가 그 하늘에 나뭇가지를 박고 실핏줄 같은 섬세한 선을 따라 소묘하고 있다. 우듬지가 꼼지락꼼지락 봄을 감지하려는지 미세하게 움직인다. 

 

 종일 책을 읽다가 산책길에 나섰더니 흐릿하고 건조했던 눈이 좀 밝고 시원해졌다. 1년 중 상반기에는 좀 시간적인 여유가 있는 편이다. 요즘 미처 읽지 못하고 미루적미루적 밀쳐놓았던 책들을 책상에 쌓아두고 읽는 중이다. 장시간 독서를 하다 보면 눈이 건조하고 흐릿해져서 불편을 겪는 일이 예삿일이 되어버렸다. 그럴 때는 잠시라도 환기를 하거나 자주 산책을 하면서 멀리 하늘을 보고 나무를 보며 깊게 호흡을 하면서 걷는다. 그러면 눈이 시원해지고 마음도 편안해진다. 뭔가 정리가 되는 홀가분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책상에 놓인 책을 보니 두루두루 장르가 다양하다. 장편소설, 산문집, 시집, 시조집, 동시집, 그림동화, 동인지 등등. 평소 바쁘다는 핑계로 편독(偏讀) 아닌 편독(偏讀)을 했었다. 이제는 손에 잡히는 책을 가리지 않고 읽기로 다짐했다. 편독(遍讀)의 풍성함과 편독(遍讀)의 즐거움으로 산책의 맛도 더 깊어진 것 같다. 

 

 한번은 겨울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걷는 것을 좋아해 비가 내리는 날에도 산책을 나간다. 우산을 쓰고 나무 숲길을 걸었다. 빗소리의 리듬에 맞춰 걷다가 소나무를 향해 고개를 젖히고 숨을 크게 들이쉬며 솔향을 맡는데 갑자기 눈이 하얗게 내리더니 금방 쌓이는 것이었다. 빗소리가 눈이 내리는 소리로 들리고 바닥에는 눈이 하얗게 쌓이기 시작하더니 순간 천지가 눈으로 뒤덮이는 것이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눈이 다져지는 소리까지 들리는 듯했다. 하얀 세상이 너무 아득하고 막막해서 누에고치처럼 갇혀서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겨울비답지 않게 다시 빗줄기가 세차게 굵어지면서 눈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가 있었다. 

 

 산책을 나서기 전에 읽던 소설 속 주인공이 끝이 보이지 않는 눈 속에서 역사의 암흑기를 맞이하며 갈등하던 지난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독자인 나에게까지 감정이 이입되어 있던 터라 내리던 비가 순간 눈으로 내려 쌓인 것이다. 잠깐의 착각이었지만 소설 속을 넘나드는 기분이 과히 나쁘지 않았다. 

 

 다시 비를 맞으며 걸었다. 우산에 떨어져 닿는 빗소리가 더 또렷하게 들렸다. 마치 북채로 두드리는 북소리의 리듬처럼 들렸다. 빙그레 미소가 지어졌다. 이번에는 굵어지는 빗속에 발걸음을 재촉하며 하나둘씩 나타나는 우산을 떠올렸다. 빗방울이 떨어지면서 바닥에 고인 물에 수도 없이 많은 동그라미를 그리며 사라지고 다시 동그라미가 시작되어 곡선을 그리며 퍼져나가기를 반복했다.  

 

 내가 아끼고 좋아하는 그림책 중에 우산 그림만 나오는 책이 있다. 글은 없고 그림만 있는 그야말로 순수한 그림책이다. 한 개로 시작한 우산 그림이 책장을 넘길수록 많아지며 어디론가 이동을 한다. 빨강, 파랑, 노랑, 주황 등 우산이 하나둘씩 많아지며 길을 지나고 횡단보도를 건너고 놀이터도 스쳐 지난다. 그리고 학교 교실 앞 우산꽂이에 접힌 우산이 가득하게 꽂혀있는 장면에서 그림책이 끝난다. 글도 없고 사람도 없지만 도착한 곳이 바로 학교이며 이미 모든 학생들이 교실에 들어갔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재미있는 그림책이다. 글이 없는 그림책이지만 정해진 이야기가 없으니 수많은 이야기를 만들 수 있어서 볼 때마다 새로운 책처럼 흥미로운 책이다. 대상에 따라 끝없는 이야기보따리가 열리게 되고 독자도 작가가 될 수 있어서 즐거운 그림책이다.

 

 다시 비가 좀 잦아들어 빗줄기가 가늘어졌다. 더 진해진 소나무 향기가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멋지게 휘어져 하늘에 박힌 우듬지가 보이진 않았지만 향기를 내뿜어 존재를 알리고 있었다. 나는 습관적으로 우산을 높게 치켜들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주변은 이미 뿌연 비안개에 잠식되고 있었다. 

 

 나도 비안개 속으로 끌려들다시피 또 다른 소설 속으로 진입하고 말았다. 소설의 배경인 전라도의 사투리에 처음에는 좀 익숙하지 않았지만 어느새 잘 익은 김치를 베어 먹는 기분으로 맛깔스러운 대화에 끼어들게 되었고 나도 모르게 동참하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시인이 역사 유적지를 직접 돌아보며 쓴 동시를 따라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호사를 누리기도 했다. 역사의 어느 한 시점에서 두리번거리면서 소중한 역사의 흔적 앞에 새삼스레 고마운 마음을 확인이라도 하듯이 동시의 리듬에 따라 걸었다. 호리낭창한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면서 후두둑 빗물을 쏟아내자 도미노처럼 어쩌면 돌림노래처럼 숲이 리듬을 타기 시작했다. 그제야 일상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비가 내리던 그날뿐만 아니라 즐거운 산책의 기억은 나를 자주 숲길로 나서게 한다. 석양빛이 돌자 파랗던 하늘에 혈색이 돌아 온활해졌다. 구름이 잿빛 그림자로 영상처럼 빠르게 지나가고 미세하게 움직이던 나뭇가지들도 밤에 들 준비로 좀 부산해졌다. 나도 덩달아 발걸음이 빨라졌다.  

 

 편독(遍讀)에서 비롯된 산책의 풍성함은 숲길도, 숲에서 만나는 나무도, 우듬지 속 하늘도 넉넉하게 품어준다. 그 넓은 품 안에서 오늘도 나는 나를 만난다.

 


 

 

충북 괴산 출생

2003년 시인으로 등단(문예연구)

뒷목문학회 회원

시산맥시회 회원

시집 '볕 좋은 날' 외 다수

산문집 '곁에 있어준다는 것'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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