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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기획-한국 문인협회 캐나다 밴쿠버 지부> 서 있는 시간들
 
줄리아 헤븐 김 수필가   기사입력  2024/03/21 [16:51]

▲ 줄리아 헤븐 김 수필가  © 울산광역매일

 그리움에 갇혀있던 기억들이 투명한 방울을 밀어내며 꿈틀거릴 때면 신기하게도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다. 의지와 상관없이 만들어진 눈물은 상기되어 가는 두 뺨 위에 세찬 물줄기를 대고 멈춰있는 시간 속으로 나를 끌어당긴다. 그렇게 생성되는 또 하나의 시간을 즐긴다. 흐르지 않는 정지된 순간에 꼼짝없이 갇히기 때문이다.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떻게? 선택의 고민과 생각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 오롯이 그 안의 나를 찾아 교감하면 된다.

 

 서 있는 시간 속에 갇혀있던 수많은 기억이 추억으로 그리움을 동반할 때면 순간이동을 하듯 단발머리 여중생이 되기도 하고, 양 갈래 땋은 하얀 카라의 교복을 입은 여고생이 되기도 한다. 샘 솟는 방울이 끌고 나오는 감정은 그때마다 시간의 주관자가 내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 준다. 가끔은 아쉬움으로 남겨진 안타까운 시간의 멈춤도 있고, 후회로 점철된 딱한 시간도 섞여 있다. 하지만 생각이라는 걸 굳이 끼어서 맞춰 보면, 지금의 나조차도 알 수 없는 연민에 휘감긴 애틋한 시간이 더 많다. 아마도 추억을 품고 있는 모든 기억이 현재가 아닌 이미 지나간 과거의 시간이라 그럴지도 모른다. 그래서 같은 의미의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궤변을 혼자만의 암호처럼 추억을 ‘서 있는 시간’으로 은유적인 표현을 한 것이다.

 

 예전에는 그 당시의 상황이나 정황을 곱씹어 봐도 서 있는 시간 안에는 행복하고 신나는 기억밖에 들어있지를 않았다. 아니 엄밀하게 말하자면 내가 우선이고 내가 옳았던 기억들만 떠올려졌다. ‘예전엔 그랬는데…’라는 자아도취에 흥겨워 물 표면에 비친 내 모습에 취해 시퍼런 물속도 마다치 않고 뛰어드는 어리석은 나르시스와 같았다. 그런데 나이에 붙어가는 숫자가 커질수록 소환되는 추억이 명화의 한 장면이 아닌 감정도 예전과 다름을 스스로 조금씩 인지하고 있다. 일인칭 주관자로 통치하던 서 있는 시간 속의 세상에서 이인칭 또는 제삼자의 시선으로 멈춰있는 시간 속의 내 곁에 서 있는 여유도 생겨났다. 

 

 최근에 신인 트로트 가수, 임영웅을 통해 ‘바램’이라는 노래를 들은 적이 있다. 노랫말은 나의 멈춰 서 있는 시간과 아무런 관련도 없을뿐더러 소환될 어떠한 기억도 연계된 것이 없다. 그런데도 “우린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익어가는 겁니다.”라는 구절에서 눈물이 마구 솟구쳐 올라왔다. 까닭 모를 물기를 노래가 끝날 때까지 연신 훔쳐내야 했다. 뜻 모를 작은 감동의 해프닝이 있고 얼마 후, 한 입 베어 문 잘 익은 연시의 달콤하고 향긋한 홍시 향이 혀끝에 감아 돌자, 애잔하게 심금을 울리던 그 노래 소절이 생각났다.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워 입안에서 사르르 녹듯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붉은 홍시. 과일이 맛과 지닌 향을 제대로 뿜어낼 때가 환갑을 지나 세상 이치에 조금씩 달관해 가는 멋스러움이 연륜에 묻어나는 사람과 닮은 것 같다. 그래서 사람이 늙는다는 것은 개개인 스스로 만들어가던 독창적인 향 속에 우리라는 향을 적절하게 배합하고 섞어 선한 영향력을 지닌 향이 몸에 배어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세상에는 맛보지 못한 수많은 과일이 있듯 아직 맡지 못한 무수히 많은 향이 있다. 왠지 나의 서 있는 시간 속에도 향기가 묻어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풋내 올라오는 애송이의 싱그러운 향, 설레던 첫사랑의 상큼한 향, 반면에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어대는 시기와 질투의 유쾌하지 않은 냄새도 있을 것이고… 어찌 되었든 좋은 향과 나쁜 냄새 모두 멈춰 서있는 시간 속에 담긴 나의 옛 모습이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생각과 좋은 행실을 바로 조금 전, 서 있는 시간 안에 차곡차곡 채워 넣어야 한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맡아본 향내 중에 단연코 으뜸인 향이 있다. 예수님의 사랑의 향기이다. 너무나 포괄적인 그의 사랑의 향기에 나도 한 가지 향이라도 빚을 수만 있다면… 그 바람으로 지금 딱 한 가지 만들어 가고 익어가도록 애를 쓰는 향은 있다. 요한복음 8장 7절의 “너희 가운데에 죄가 없는 자가 먼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라는 말씀처럼 사랑의 향과 고결한 맛을 전수 받아 돌을 내려놓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돌을 던지면서도 던지는 줄 모르는 아둔한 사람이 되지 않도록, 손안에 쥔 돌로 인해 악취가 진동하지 않도록, 내 안의 교만과 오만 그리고 자만이 빚은 위선으로 썩은 오물은 모두 쏟아내고 걷어내야 한다. 그래서 은은하게 겸손이 익어 갈 수 있도록 그렇게 나이 들어가고 싶다. 그리움, 우정 그리고 사랑….

 

 나의 서 있는 시간이 삶이 정지되는 시간과 맞닿을 때,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서 있는 시간 속에 “그래도 줄리아의 향기가 향긋했네….”라고 한다면, 나는 흐르는 시간 속에 행복한 사람으로 살다 간 정말 복 있는 사람일 것이다. 

 


 

 

줄리아 헤븐 김 / 아호 예함, 수필가, 시인 

예함 청소년 크리스천 문학상 운영위원장

수필집 <썸 타는 여자>

 

2009년 : 캐나다 한인문학가협회 신춘문예 수필 부문 당선

2019년 : 2019 겨울 현대시문학 수필 부문 신인상 등단

2020년 : 제1회 삼행시 문학상 금상

2024년 : (사)한국문인협회 밴쿠버지부 신춘문예 시 부문 장려상

 

2015년~ (사)한국문인협회 회원 및 캐나다 밴쿠버지부 회원 

2020년~ 현대시문학 작가회 회원 

2024년~ 계간 <시산맥> 특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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