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국 산하 남쪽 어느 시골 마을에 한 어린 소년이 있었다. 물이 맑고 산세가 우거진 그 아늑한 시골 마을은 온 동네 이웃이 다 한 가족처럼 살았다. 모두가 아재, 이모, 고모, 삼촌이라 부르며, 서로를 끔찍이나 아끼는 큰 대가족 같은 공동체 마을이었다. 서울에서 이사 온 소년에게 한 번에 많은 친척과 친구들이 생겼고, 그곳은 퍽이나 다정하고 따스한 곳이었다.
시대가 험해서 먹고 사는 것이 궁했고 옷과 생필품조차도 부족했지만 소년의 시골 마을에는 나름의 즐거움이 있었다. 소년들은 학교에서 돌아오면 저마다 소를 몰고 지게를 지고 또래끼리 산으로 향했다. 군불 지필 나무를 구하고 소 먹일 풀을 베며, 그렇게 부모님들을 돕는 것이 그들의 오후 일과였다. 산에 가서는 소들을 풀어놓아 자유롭게 맛있는 풀을 뜯도록 하고, 지게는 받쳐 놓고 머슴애들의 짓궂은 장난을 하곤 했다. 가끔은
동네 아저씨네 고구마 밭이나 감자 밭을 더듬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길 가에 있는 콩 한 두렁은 으레 소년들을 위해 양해된 배려였다. 풋보리를 베어서 불에 그슬린 다음 손으로 비벼 한 움큼 입에 넣는 기분은 그걸 모르는 사람은 얘기해줘도 못 알아듣는다. 그 시절에 눈썹이 온전한 녀석은 친구가 아니었다. 정도가 좀 심해서 주인 아저씨에게 꾸중을 듣기도 하고 부모들에게 알려지면 걱정을 끼쳐드리기도 했었다. 하지만 가끔씩은, 나중에 크면 무엇을 할 것인지, 어떤 사람이 되려는지 진지한 대화를 나누곤 했다. 지게를 받쳐 놓고 둘러앉아 소중한 꿈을 키우는 시간이었다. 누가 “철학은 희랍에서 꽃피었다”는 잘 알지도 못하는 소리를 했는지...
지역 마을의 구심점 중 하나는 예배당이었다. 여러 연령대의 구성원들이 교회라는 공동체를 통해 자신들과 사회를 살찌우는 것은 흐뭇한 일이다. 요즘에는 한국의 밤이면 시내의 멀지 않은 거리에 십자가 불빛이 즐비하다. 그러나 여러 마을을 건너야만 드물게 교회가 하나씩 있었던 시절도 있었다. 오래전 소년이 다니던 오막살이 시골 교회에서는 일년에 한두 번 정도밖에 목사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자그마한 시골 교회에 정주하는
담임 목사가 계시지 않았기에, 읍내에 계신 목사님이 지역의 여러 교회를 돌아가며 차례로 방문하여 돌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끔씩 외부 연사들이 배정되는 일주일 정도 기간의 사경회나 부흥회 때는 작은 시골 교회의 모든 교우들이 들뜨고 행사를 준비하느라 분주했다. 그때 소년의 어머니는 이른 봄부터 준비한 다양한 진귀한 반찬들을 모두 진열할 참이었다. 그때가 일 년 중 가장 귀한 음식들을 맛볼 수 있는 때였다. 그렇게 사경회나부흥회는 공동체의 큰 행사로 일 년 전부터 준비되곤 했다.
시골 농촌 교회에서 사경회는 보통 바쁜 일손을 피하고 성경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는 아주 추운 겨울의 농한기를 이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그 해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새벽 기도회와 아침 공부, 저녁 공부로 이어지는 강의는 시골 순박한 이들의 마음에 불을 지폈다. 갈급한 심령들이 가슴 한가득 풍성하게 채워지는 경험은 특별한 은총이었다. 그들은 마음이 뜨거워진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그래서 교우들은 이구동성으로 젊은 목사님이 참 멋있다고 말했다. 아니, 그 목사님이 전하는 메시지가 아주 멋있었던 것이다. 그는 아직 경험이 많지 않은 풋내기 전도사였지만, 우리는 그를 목사님이라 불렀고 그의 메시지는 힘이 있고 은혜스러웠다. 어린 소년의 가슴에도 깊은 울림이 있었다.
그때 어린 소년은 찬 마루 바닥에 무릎을 꿇고,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가 드렸던 서원(사무엘상 1:11)과 비슷한 기특한 기도를 올렸다. 자기도 나중에 크면 산간 외지 마을들을 찾아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뜨겁게 해주는 멋진 목사님이 되고 싶다고! 그새 강산이 여러 번 바뀌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소년의 그 기도를 귀 담아 들으셨나 보다. 그 소년도 이제 바다를 건너고 산을 넘어 여러 곳에서 또 다른 소년들을 만나고 있으니...
그런데 이번 주말에 그 ‘멋쟁이 젊은 목사님’이 그 소년이 있는 밴쿠버 교회에 오신단다. 그 목사님이 도대체 어떻게 생긴 분이신지 오늘 나는 유심히 볼 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