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둑한 옆방 저편에서 요강 뚜껑이 덜그럭거렸다. 할머니가 힘겹게 몸을 일으키시는 기척이 났다. 일어나 도와드려야 하나, 모른 척 누워 있어야 하나 고민스러웠다. “할머니 도와드려요?” 무심한 듯 말을 건넸다. “아냐, 괜찮아, 자라.” 손녀에게 그런 모습까지 보이고 싶지 않으신 걸까? 그래도 나가서 도와드려야 할까? 마음이 조마조마해 잠들지 못하고 귀를 기울였다. 할머니는 한참 요강과 실랑이를 하시다가 소변을 보시고는 다시 자리에 누우셨다. 할머니는 유방암 말기였다. 몇 주만이라도 할머니와 함께 있고 싶어서, 잠시 서울 학교 일을 접고 할머니가 계신 홍산 시골집에 내려왔다.
할머니는 손자, 손녀들이 거의 스무 명이나 되었지만, 나를 특히 예뻐하셨다. 저녁 식사 후 함께 TV를 보다가도 어떤 여자 탤런트가 나오면, “우리 지낭이랑 똑같네!” 하시며 좋아하셨다. 나는 도대체 어디가 닮았냐고 물으며 함께 웃었다. 할머니 눈에 보이는 대로 내 모습이 좋았다. 어린 시절 종종 나와 두 동생들은 할머니 댁에서 방학을 보냈다. 하루 종일 동네 개울에 나가 송사리도 잡고 미꾸라지도 잡고 댐도 만들며 놀았다. 간혹 밤에 동네 남자아이들이 개구리를 잡아먹었는지 개구리 다리만 덩그러니 바위 위에 놓여 있을 때도 있었다. 여동생이 안방 문 문풍지에 구멍을 내 바람이 솔솔 들어와 혼나기도 했고, 달고나를 한다고 냄비와 국자를 태우고는 몰래 마당에 묻었다 들키기도 했다. 아랫동네 외삼촌 댁 밭에서 수박을 한 아름 따 안고 산길을 걸어 내려올 때면 신이 나 노래를 흥얼거리곤 했다. 그렇게 몇 번의 여름을 할머니와 함께 보냈다.
할머니의 암은 이미 많이 전이되어 더 이상 수술이나 다른 치료를 받으실 수 없었다. 가슴이 문드러지고 썩어가는 모습을 보며 옆에서 해드릴 수 있는 것들이 많지는 않았다. 집 안 일과 간병을 해주시는 아주머니가 해주신 밥을 같이 먹고, 잔 신부름을 했다. 할머니는 아프신 와중에도 종종 나에게 귓속말로 간병인이 시장을 적게 봐 오고, 돈을 조금씩 가져가는 것 같다고 의심을 하셨다. 장을 보거나 밥을 하거나 하는 일상적인 일들을 스스로 하지 못하시는 것에 힘들어 하셨다.
할머니의 집은 마을 높은 언덕에 있는 작은 시골집이었다. 방이 세 개 있고 앞에는 튓마루가 있었다. 집 뒤에는 대나무 숲이었다. 안방 앞문과 뒷문을 열고 있으면 시원한 산바람이 불어왔다. 집 앞에는 수돗가와 텃밭이 있었다. 작은 시내가 반쯤 둘러 있고, 담이 따로 있지는 않았다. 할아버지는 이 집에서 오래전에 돌아가시고 할머니가 홀로 일곱 자식을 키우셨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교감 선생님이라고 하셨다. 내가 오래된 할아버지 사진을 찾아내기라도 하면 할머니는 손사레를 치시며, “에고, 내가 속아서 결혼했어!” 하고 웃으시며 투덜거리셨다. 할머니는 마음이 넉넉하셔서, 음식 한 가지를 해도 동네 사람들에게 자주 나누어 주셨다. 부추전을 좀 부치시면 나와 내 동생들은 언덕 아래 몇몇 집들을 돌아다니며 음식 나르는 심부름을 하곤 했다. 직접 만드신 된장을 호박잎에 싸 먹든 텃밭에서 딴 열무로 김치를 해 먹든 할머니 음식은 다 맛이 있었다.
할머니는 대부분의 시간을 잠들어 계셨다. 가슴에 새로 감은 붕대는 이미 군데군데 노랗고 붉은 얼룩으로 물들어 있었다. 종양으로 인해 살이 부풀고 썩어가고 있었다. 짜증 한번 안 내시고 잠잠하시다가 가끔, “너무 아파서 죽었으면 싶다.” 하고 한숨 쉬시는 듯 말을 토해 내셨다. 나는 “할머니 그런 말 마세요.” 하고 타박하며, 물과 진통제를 드렸다. 고통의 어느 한 조각도 나의 것이 되지 못해 한스러웠다.
주무시는 할머니 곁에 있다가, 잠시 바람을 쐬러 밖에 혼자 걸어 나왔다. 동네 앞 8월의 숲은 무섭도록 푸르고 생생했다. 잔인하게 느껴졌다. 바람에 흔들리는 짙은 초록 나뭇잎들이 할머니의 젖가슴에 달라붙어 있는 암세포처럼 탐욕스럽게 보였다. 스무 살의 내가 미워졌다. 그렇게 여름이 지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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