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광식 논설위원 교육학 박사 © 울산광역매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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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년 전 이맘때쯤, 한반도는 전쟁의 여파로 역사 이래 가장 지독한 지옥을 겪고 있었다. 국제 정세는 냉전으로 치닫고 있었고, 냉전의 여파는 우리 민족을 곤경의 구석으로 몰아넣었다. 그 결과 수많은 억울한 희생자가 발생하여 그 후유증이 아직도 완전히 치유되지 못하고 남아있다. 대표적인 것이 국민보도연맹 사건이다.
국민보도연맹 사건은 6ㆍ25전쟁으로 말미암아 1950년 6월 말부터 9월경까지 군과 경찰에 의해 민간인이 희생된 사건이다. 인민군이 남침하고 내려오는 과정에서 그들에게 부역할 수 있다고 의심되는 민간인들을 법적 절차 없이 학살한 것이 주요 내용이다.
울산에서도 있었다. 울산은 870여명이 보도연맹 예비검속자들로 분류돼 당시 울산지구 방첩부대와 경찰에 의해 1950년 8월경 10여 차례에 걸쳐 울산군 온양면 대운산 골짜기와 청량면 삼정리 반정 고개에서 집단 총살됐다. 울산 북구 강동 신명리 수지골에선 경주 감포, 양남, 양북 지역 출신 보도연맹원 230여명이 희생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제는 당시 희생된 보도연맹원 중 실재 좌익 활동에 가담하지 않은 순수 민간인들이 상당수 있었다는 점이다. 유가족들은 거의 10여년 동안 사회적 분위기에 억눌려 있다가 1960년 8월24일, 울산국민학교에서 처음으로 합동 위령제를 열었고, 함월산 백양사 앞에 희생자 합동 묘를 세웠다. 그러나 곧 들어선 군사정권이 반공을 국시로 내세우며 울산 보도연맹 합동 묘를 없애고, 유족회를 불온 단체로 규정했다. 이후 유족들은 연좌제에 묶여 사회활동에 적지 않은 수난을 겪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내 민주화 분위기에 힘입어 2006년 10월10일 전국 최초로 울산 보도연맹 사건에 대한 직권조사가 실시됐다. 2008년 1월에는 울산 보도연맹 사건에 대해 대통령이 직접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고 사과했다. 국가 차원의 사과는 이때가 처음이다. 2012년 8월30일에 대법원이 울산 보도연맹 사건에 대한 국가 배상 책임을 확정하였다. 이후 함월산 기슭 한적한 주택가 뒤편에 울산 보도연맹 위령탑이 세워졌다. 하지만 사회적 아픔을 완전히 치유하기에는 역부족인 게 사실이다.
이쯤에서 보도연맹 희생에 대한 실상을 정확히 알아 둘 필요가 있다. 희생된 사람 중에는 동구 지역에서 보성학교를 중심으로 항일운동을 펼쳤던 박학규, 장병준, 장기준, 장인두 선생 등이 있다. 병영 지역에는 이윤조, 이문조 선생이, 울산 읍내에는 김상헌 선생이, 언양 지역에는 이동계 선생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울산지역에서 신망이 두터웠던 항일운동가 출신이다. 이들이 연행돼 처형됐다. 억울한 희생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한편 이들의 희생을 막으려는 의인들도 있었다. 오강환 선생과 조두천 선생이다. 오강환 선생은 1950년 당시 서창파출소장으로 보도연맹원 명부를 불태워 웅상 청년 300여명을 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울주군 삼남읍 교동리에 살던 조두천 선생은 면사무소에 근무하면서, 보도연맹 명부를 불태워 역시 인근 주민들의 생명을 구했다.
지금도 빨갱이라는 이름으로 깔린 사회적 트라우마가 완전히 치유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픔을 겪었기 때문에 앞으로 우리 사회에서 그러한 사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사회구조를 탄탄하게 만들어야 할 책임이 있다. 진지한 반성과 성찰이 없다면 돌발 사건이 다시 발생했을 때 똑같은 과오를 되 풀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런 반인륜적 사건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교육을 통해 자라나는 미래 세대에게 정확한 사실을 알리고 재발을 방지해야 한다. 아픈 역사를 기억하지 못하는 민족은 그 아픈 역사를 반복한다고 했다. 우리가 울산 보도연맹 위령탑이 갖는 역사적 의의를 정확하게 되새기고, 앞으로 이를 사회적 합의, 미래 지향적인 평화ㆍ인권 교육의 장으로 승화시키는 다각적인 노력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