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holybible.or.kr/mobile
마태복음 16장 16절에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잘못을 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실수도 많고 잘못도 많이 저지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고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여달라고 말하자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다고 하시고 그들을 떠나셨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그 당시에 가장 종교성이 강한 집답이었고 이스라엘 민족 사이에서는 가장 강력한 세력을 가진 그룹이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2천년전의 이야기이고 너무 멀리 있다고 생각하지만 오늘날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누구일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사람들은 많은 사람들이 모인 곳에 있고 싶어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선택한 곳이라면 뭔가 검증이 되었고 안정적이며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어보면 초대교회와 예수님을 따라간 사람들의 선택은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눈에는 멍청하고 황당하기 이를데 없는 무모한 사람들로 보였을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표적을 보여달라고 한 이유는 무었이었을까요? 아마도 생각해보며 이들 역시 기적을 행하는 예수님을 의식하고 있었고 만약 그 자리에서 예수님이 기적을 보여주면 아마도 예수님을 신뢰할 수 있을것 같다는 희망을 갖고 왔을 수도 있고 또 한편으로는 자신들이 들은 기적은 뜬 소문이니 직접 확인하고 아예 예수님을 배제하려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떡 일곱개로 사천명을 멍기고 주운 것이 몇 광주리였는지 기억하지 못하느냐 반문하십니다. 그러나 이것은 떡에 관한 것이 아니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을 주의하라는 말이라는 점을 11절에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다시 물으십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로 알고 있느냐?라고 말입니다. 세례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이는 예레미야, 또는 선지자들의 하나라고 한다고 답을 합니다. 예수님은 이 대답에 아무 말씀을 하지 않으시고 다시 물으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라고 말입니다.
교회사를 읽어보면 한 시대를 바꿨던 커다란 영성운동이 제대로 결실을 맺고 이어지는 것을 보기 힘들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은 항상 영적인 각성과 깨달음, 복음으로 시작했던 운동도 육신적인 욕심과 욕망, 사람들의 탐욕으로 희미해지고 혼탁해진 경우가 너무 많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인문주의자들과의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그들의 질책은 때로 정당했고 사실로 따지면 잘못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복음은 완전합니다. 그러나 그 복음을 받은 인간은 늘 쉽게 넘어지고 타락하고 변질되기 일쑤였습니다. 하지만 그 복음을 받은 인간이 타락했다고 해서 복음이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넘어진 것은 인간이지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렇게 큰 영성 운동이 일어나 문제가 생길때마다 항상 인본주의적으로 돌아서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알고 있는지 물어보십니다. 세례요한은 당시 모든 잘못을 돌아서서 반성하고 회개해야 한다는 개혁을 상징하니 그렇게 말한 사람들은 예수님이 부패한 시대와 로마의 압제에서 자신들을 건져낼 자신들의 메시야로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엘리야같다고 한 사람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을 보고 예수님의 능력에 초점을 두었을 것이고 예레미야라고 말한 사람들은 백성들을 위해 눈물흘리며 기도하며 사랑과 헌신을 예수님의 속성으로 믿었을지 모릅니다. 선지자라 한 사람들은 미래를 예언하는 선지자의 한 사람으로 생각한 것이겠죠?
그러나 시몬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베드로는 엄청난 신학적인 배경과 구약성경에 대해 정통한 학자로서 이 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이 고백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이를 알게 하신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로 고백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베드로는 은혜로 학문으로 깨우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이 믿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뒤에 일어난 일은 고개를 갸웃거리게 합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베드로는 예수께서 잡혀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날 것이라고 말하자 향변하며 그리 마옵소서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장면은 어찌 보면 너무나 인정많고 당연한 제자의 모습처럼 보이지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라며 저주와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그가 사람의 일만 보고 하나님의 일을 보지 못했지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은혜로 믿음의 고백을 했지만 그 역시 각인된 것으로 육신적인 일을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믿음생활을 하면서 이렇게 순간순간 어쩔 수 없이 인간적인 생각에 빠집니다. 그리고 기도할때도, 하나님을 바라볼때도 자신의 색깔과 렌즈로 내가 원하는 하나님을 만들어 기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생각하는 모습처럼 자신만의 생각과 관점으로 하나님을 믿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지음을 받은 존재이지 하나님을 우리 멋대로 만들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절대 계획을 믿고 절대 주권을 따라야 합니다. 이해가 되는 것과 믿어지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지금 당신의 기도 방향은 어디에 있습니다. 이해가 되는 쪽인가요? 믿어지는 쪽인가요? 하나님과 나 사이에는 어떤 것도 끼어들어서는 안됩니다. 당신의 주관이나 생각이나 가치관이나 세상의 편견이나 다수의 생각 등등 그 어떤 것도 끼어들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나의 기도를 점검합시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가면 28절의 응답을 우리도 누릴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출처] 2025년 1월 16일 오늘의 책 : [마태복음 16장] 하나님 (문헌정보팀 WE) | 작성자 문헌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