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 정말 미안한데 부탁 하나 들어줄래? 아주 영 오천 년 역사에도 없는 애교와 아양으로 말하며 다가오는 품새가 살짝 긴장된다.
뭐 ~ 뭔데? 국회 장악하라는 명령보다 마음이 더 납작해졌다. 무장도 안한 士字 붙은 늙다리 몇 잡는데도 특수부대, 정보사령부 HID 수방사 등 어마 무시한 병력과 헬기까지 동원하는데 난 그냥 힘으로 해도 지는 현실인데 내가 긴장인지 간장인지 안되겠어.
음~ 말이야... 청소기 좀 돌려줘. 거실하고 방 전체를~ 응~ ??? 그게 다야? 이것 봐라 별것도 아닌 요 부탁을 하는데 오천년 역사에도 없는 부탁 말씀을 이렇게 부드럽고 사랑스럽게 해?
이십 년을 사용해도 고장 한번 안난 신용카드 포인트와 바꾼 육중한 독일제 유선청소기를 벌떡 들고나와 돌린다. 그 무겁다는 통을 한쪽 손에 들고서. 속으로 이놈의 청소기가 고장이 나야 로봇 무선 청소기로 바꾸어 이 고생을 안 하지라는 생각이 청소할 때마다 들었지만 청소기는 보란 듯이 더 잘 돌아가고 있었다.
무거운 청소기를 왜 들고 해? 놓고 해도 되는데. 어쭈 이것 봐라. 청소를 시키지나 말든지 꼼꼼하게 구석구석 밀고 있는 나에게 선심 쓰듯 말을 건넨다. 괜찮아 안 무거워. 그러면서 열심히 청소를 끝내고 제자리에 갖다 놓고는 초등학생 숙제검사받듯 마침표 눈을 주면.
수고 했어. 정말 깨끗하게 잘했네~ 이제 여기 와서 좀 쉬어 여보! 갈수록 요상한 친절이 태산처럼 다가온다. 그래도 고 말이 영 싫지는 않았다. 부부 사이에 전기 안 들어온 지 몇 년이 지난 건 둘 다 아는 일이라 스스럼없이 곁으로 간다. 아내는 내 팔을 정성껏 토닥거리며 주물러준다. 아내가 지금까지 청소할 때는 내가 한 번도 해 준 적이 없는 안마를.
이거 왜 이래. 괜찮아... 힘드니까 그냥 둬. 아냐 당신이 튼튼해야 매일 청소해 주지.
그날 이후 청소기 돌리는 일은 아예 나의 전속이 되었다. 생각해 보면 내가 하는 게 여러모로
편해지는 일이겠다 싶기도 해서 군말 없이 하기 시작한 게 벌써 해를 넘기고 있다.
이젠 당연한 듯 아내는 의자에 앉아 폰 속에 푹 빠져 희희낙락 청소기 돌릴 때마다 두발을 들고 공간을 내준다.그것만이면 얼마나 좋으랴. 아내는 그 후로도 코빵맹이 소리를 내며 당신 밥도 잘 하더라~ 설거지도 잘 하더라~ 세탁물 마른 거 걷어서 제자리 갖다 두는 것도 잘 하더라~ 온통 잘 하더라 천국이 되었고 난 그 잘하더라에 힘을 얻어 군말 없이 크고 작은 집안일을 하기 시작했다.
엄마가 살아 계셨다면 경천동지에 불알 떨어진다고 난리가 났을 그 일들을 토하나 달지 않고 해나가고 있었다. 일제 36년 가난하고 힘없는 민초처럼 말 한마디 않고 수행해 나갔다.
사실 아내는 나이보다 늦게 갱년기가 왔고 그래서 오른쪽 팔이 유난스레 아프다고 침 맞으러 다니고 있어 당연히 내가 하는 게 지극히 정상인 가사일을 마치 시혜처럼 생각 하는 동안 어느덧 습관처럼 자리 잡고 말았다.
이젠 아예 검열관이 되어 여기도 그냥 안하고 지나갔고 저기도. 그리고 그릇 씻을 때도 구석구석 손 넣어서 잘 씻어야지. 이게 뭐꼬? 다시 해. 수건도 착착 잘 게겨야 공간에 다 들어가지~
양말 신은 건 저기 세탁실에 갖다 놔야지 여기 두면 보기 싫고 또 손이 한 번 더 가야 하잖아.
아~ 그거. 한 번 더 신고 세탁하려고 거기 뒀어. 냄새나고 발에 무좀 걸려 한번 신은 건 무조건 저기 내놔야 돼. 아주 잔소리가 기차 곱빼달리듯 이어져 나온다. 그래도 군말 없이 해오다 갑작스럽게 반항의 포고령을 준비하고 야밤이 아닌 벌건 대낮에 거사를 치르기로 하고 일을 벌였다.
당신 이리 와서 앉아봐. 대뜸 내지른다. 그래 내가 그렇게 만만하게 보여? 남편 알기를 도대체 뭘로 알고 밑도 끝도 없는 고사포가 아닌 아무 막말이나 내 질렀다. 지르는 순간에도 아내는 태연 작약이다. 나만 달아올라 야단법석이다. 마치 무대뽀처럼.. 그러나 결과는 판정패가 아닌 완패다.
이순신의 노량 전투에서 보다 더한 참패를 당하고 그 대가로 몇 가지 일들을 더 받았다. 그것뿐인가 외출 나가있다가 톡 문자가 오면 내가 올린 글의 맞춤법이 틀렸다. 몇 번째 줄 어디가 어떻게 틀렸으니 고쳐라. 빨리~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난 아내보다 한참을 더 산 대한민국 남자인데 말이다. 가끔 수틀려 삐쳐 있으면 아무렇지도 않게 다가와 커피 먹을래? 뭐 맛있는 거 해줄까?
오늘 밖에 나가보니까 당신한테 잘 어울릴 옷 하나 봤어 그거 사러 같이 가자. 참~ 나 도대체 종잡을 수가 없다. 반란도 꿈꿀 수가 없다. 해봤자 백전백패다.
가정의 평화는 아내 말을 잘 듣는 일인 줄 늦은 나이에 알게 되었고, 조선의 사대부 정신을 버리는 일이라는 것을 늦게 알게 된 지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