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광역 에세이> 바람 같은 말
 
이용희 시인 시산맥 회원   기사입력  2022/10/04 [17:46]
▲ 이용희 시인 시산맥 회원     © 울산광역매일

 언니 둘과 여행 중이다. 

 

 자매들이 만나면 언제나 이야기의 시작과 끝은 어릴 적 이야기 들이다. 나는 막내라서 언니들과 공유할 수 있는 일이 많지는 않다. 그렇지만 한 부모님의 울안에서 일어난 옛 이야기들은 말로 다 할 수 없다.

 

 바다를 끼고 돌아가는 모롱이다. 하늘이 구름에 덮여 바다가 되었다. 물결처럼 일렁이는 구름의 색깔도 바다를 닮아 깊고 푸르다. 점점이 늘어서는 회색빛 구름 사이로 하늘이 붉다. 해가 넘어 가려는가 보다. "언니, 나는 저런 하늘만 보면 아버지 생각이 나" "왜?" "꼭 물고기 등에 있는 무늬 같잖아."

 

 아버지의 고기 종다리를 들고 개울가를 따라 다니던 생각이 나서 하는 말이다. 아버지는 막내딸인 나를 데리고 고기를 잡으러 다니셨다. 아버지는 족대로 고기를 건져 올린다. 개리라고 부르던 암 버들치 몇 마리와 부러지라는 수 버들치 한두 마리를 잡아 집으로 돌아오곤 하였다. 아버지는 족대를 툭 털어 둥글게 감아 곁에 내려놓으시고 돌 위에 앉으신다. 물이 가득 든 하얀 고무신을 벗어 탁탁 털어 신으신다. 그럴 때면 나도 꽃그림이 그려있는 코고무신을 벗어 양손으로 두드려 물기를 털고는 하였다. 지금처럼 사진으로 남길 수 있는 도구가 흔했다면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남았을까 아쉽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이야기가 된다. 언니들에게 깊게 각인된 기억속의 전쟁 이야기는 빠지지 않는다. 한국전쟁을 열두 살에 겪은 큰 언니와 열 살에 지낸 작은 언니의 추억이다. 나는 전쟁이 끝나고 나서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에 전쟁의 아픔은 없다. 그렇지만 수도 없이 들어 온 그 시간들을 들으며 얼마나 무섭고 힘들었을지 짐작은 간다. 

 

 그렇게도 아팠던 기억이지만 옛날은 역시 옛날인 것 같다. 추억은 아픈 날이거나 기쁜 날이거나 언제 돌아보아도 아름답고 귀한 보석처럼 빛난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나이를 먹으면 추억을 먹으며 살아간다고 이야기하는 것일까.

 

 전쟁이 시작되었단다. 피난을 가야 한다고 아버지께서 짐을 꾸리시고 작은 언니에게는 이불 보따리 하나를 등에 메어 주고, 큰 언니는 그릇 몇 개와 수저들을 담아 등에 지켰다. 열두 살인 큰 언니는 무언가를 생각할 수 있는 나이였는지 불안해서였는지 모른다. 아무튼 집을 떠나기 싫다고 앙탈을 부렸다. 그때 아버지께서 딸들에게 "우리 소풍가는 거란다, 소풍" 하셨단다. 소풍이란 얼마나 흥겨운 단어인가. 즐거운 미래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문이 아닌가? 작은 언니는 소풍이라는 말에 신이 나서 덩실덩실 흔들며 길을 나섰다니 웃음이 난다. 딸들의 불안할 마음을 헤아려 그렇게 좋은 단어를 구사할 수 있었던 나의 아버지는 얼마나 따뜻하신 분인가. 

 

 피난의 길과 전쟁의 아팠던 이야기가 이어진다. 전쟁은 짧지 않아 언니들은 나이를 한 살씩 더 먹었고 수복으로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미국 군대가 주둔하고 미국 병사들이 마을로 여자들을 찾아다녔다. 어머니는 두려워서 얼굴에는 타다 남은 숯덩이로 검게 얼룩을 그리고 머리는 싹둑 잘라서 남자도 여자도 아닌 모습으로 지냈다. 그런데도 미국 병사의 눈길과 손에서 자유스럽지는 못했나보다. 어느 날 미국 병사의 손에 잡혔다. 어머니를 끌고 가려는 병사와 따라가지 않으려는 어머니가 실랑이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아버지의 고함이 들렸다."M. P다. M. P."

 

 아버지의 절규에 가까운 그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그때 아버지는 공포와 황당함 속에서도 다급함을 떨치고 얼마나 의연하게 낱말 하나를 골라냈는지 존경스럽다.

 

 무엇인가 나쁜 짓을 하고 있을 때 `선생님 오신다.` 하고 누구인가가 소리치면 흩어지던 아이들이 생각난다. 미국 군인들의 행동을 제압할 수 있는 미국 군인의 헌병 M. P가 어떻게 아버지의 지혜 속에서 고함으로 터져 나왔는지 모르겠다. 가족을 지키려는 힘은 그렇게 명쾌한 단어를 골라 주었나보다.

 

 그래서 그 위기를 모면한 것은 당연하다. 줄행랑을 쳤을 미군 병사들의 꽁무니가 바람처럼 시원하다. 마치 개여울에서 낚시 바늘 끝으로 피라미를 낚아채신 듯한 아버지의 단어 하나다. 그 단어 하나가 위로와 희망을 주기도 하고 무기보다 더 강하게 적을 물리치기도 하였다. 이렇게 언니들과의 옛날이야기 속에서 아픈 추억은 통쾌한 웃음이 되고 여행은 끝자락이다. 

 

 사람들은 언어로 순간들을 표현하고 전한다. 그 말들은 바람 같아서 훈풍이 되기도 하고 폭풍이 되기도 한다. 어느 때는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는 칼날이 되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따뜻한 입김이 되어 사람들을 녹여주는 때가 더 많다. 그렇기에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웃을 만나고 대화를 나누며 정이라는 탑을 쌓아가는 것 아닐까?

 

 가족을 위하여 최상의 단어를 고를 수 있었던 아버지의 지혜를 생각하며 오늘 나의 목소리와 단어가 모든 이들에게 따듯하고 정겹게 들리도록 다듬는다.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톡
기사입력: 2022/10/04 [17:46]   ⓒ 울산광역매일
 
롯데백화점 울산점 https://www.lotteshopping.com/store/main?cstrCd=0015
울산공항 https://www.airport.co.kr/ulsan/
울산광역시 교육청 www.use.go.kr/
울산광역시 남구청 www.ulsannamgu.go.kr/
울산광역시 동구청 www.donggu.ulsan.kr/
울산광역시 북구청 www.bukgu.ulsan.kr/
울산광역시청 www.ulsan.go.kr
울산지방 경찰청 http://www.uspolice.go.kr/
울산해양경찰서 https://www.kcg.go.kr/ulsancgs/main.do
울주군청 www.ulju.ulsan.kr/
현대백화점 울산점 https://www.ehyundai.com/newPortal/DP/DP000000_V.do?branchCd=B00129000
  • 도배방지 이미지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