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워싱턴DC 국회의사당 앞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 미국 정치의 핵심인 워싱턴DC 내셔널 몰에 미술관이 들어서 있다. 사진은 지난달 14일 열린 '뮤지엄 나이트'에 참석한 관객들. (사진=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 © 울산광역매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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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워싱턴DC의 내셔널 몰(National Mall)은 미국 국가 정치의 상징으로 읽힌다. 하늘을 향해 곧게 뻗은 오벨리스크 형태의 워싱턴 모뉴먼트와 국회의사당인 캐피탈 힐을 양끝으로 길게 잔디밭이 조성돼 있고, 이 둘의 중간 지점보다 살짝 바깥쪽으로 백악관이 자리하고 있다. 내셔널 몰 인근은 국가 행정을 담당하는 각 부처가 자리한다.
그러나 연간 2500만명이 방문하는 내셔널 몰은 또한 박물관과 미술관의 집합소이기도 하다. 앞선 연재물(‘허쉬혼 미술관과 조각 정원’)에서 소개한 것처럼, 세계 최대의 문화예술과학교육기관인 스미스소니언재단도 이곳에 뿌리를 두고 있다. 재단 산하 20개 미술관과 박물관 중 17개가 이곳 워싱턴DC에 있고, 그 중 11개가 내셔널 몰에 몰려있다.
그리고 미국이 가장 자랑하는 컬렉션을 소유한 국립미술관도 이 내셔널 몰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 바로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National Gallery of Art)다.
◆압도적 컬렉션 갖춘, 미국의 자존심
내셔널 갤러리는 긴 잔디광장을 사이로 허쉬혼 미술관과 마주보고 있다. 허쉬혼 미술관이 모던·컨템포러리 미술을 주로 소개한다면, 내셔널 갤러리는 그보다 시대가 앞선다. 유럽 고대, 근대미술을 중심으로 현대미술까지 확장한 컬렉션을 소유하고 있다. 짧은 일정으로 워싱턴DC를 방문한다면 허쉬혼보다는 내셔널 갤러리를 우선 찾기 마련이다. 그도 그럴 것이 컬렉션 규모(약 15만점)만으로도 압도적이기 때문이다.
내셔널 갤러리는 크게 서관(West Building), 동관(East Building), 조각 정원(Sculpture Garden)으로 나뉘는데 연대를 기준으로 20세기 초반 작품까지 서관에, 이후 작품이 동관에 모여있다.
서관은 파르테논 신전 스타일의 고전건축물로, 잘 생긴 파사드를 중심으로 양쪽으로 길게 날개를 뻗은 모양새다. 긴 복도를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들어선 방들은 모두 전시장으로 활용되는데, 압도적인 전시 공간과 소장품 덕에 미술관의 핵심으로 꼽힌다. 존 러셀 포프(1874~1937)가 설계한 건물로 당시 전 세계에서 가장 큰 대리석 건물이었다. 안타깝게도 포프는 건물이 완공되기 전에 세상을 떠나, 직접 보지는 못했다.
서관이 들어선 자리는 원래 볼티모어 앤 포토맥 기차역이었다. 1872년부터 1907년까지 볼티모어와 워싱턴DC를 잇는 열차가 다녀, 미국 수도의 교통 중심지로 작동했다. 그러나 워싱턴DC 재건축을 꿈꿨던 ‘맥밀란 플랜’(McMillan Plan, 1902년 발표)으로 기차역이 북쪽으로 이전한다. 해당 자리엔 원래 조지 워싱턴 기념관이 들어설 계획이었으나 두 차례 세계전쟁으로 1918년부터 1921년까지 임시 전쟁 건물로 쓰였다. 이후 대공황으로 경제가 어려워져 계속 방치됐다가 1937년 국립미술관 부지로 확정된다.
미술관 부지로 낙점된지 4년만인 1941년 서관은 완공됐지만, 동관은 이보다 약 40여년 늦은 1987년에야 개관한다. 중국계 건축가 아이오밍 페이(1917~2019)가 건축을 맡았다. 동관은 서관과 달리 철조구조물과 유리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현대적인 느낌을 준다. 조각 정원은 가장 늦은 1999년 완성했다. 정원까지 친다면 62년 만에 미술관이 완전한 형태를 갖추게 됐다. 시계를 좀 더 과거로 돌리면, 미국 수도인 워싱턴DC를 계획한 ‘랑팡 플랜’(1791년)이 시작한지 200여년이 지나서야 마침표를 찍게 된 셈이다.
▲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지네브라 데 벤치’(Ginevra de’ Benci). 아메리카 대륙을 통틀어 단 한점 있는 다빈치 작품이다. 루브르에 ‘모나리자’가 있다면, 내셔널 갤러리엔 ‘지네브라’가 있다. (사진=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 © 울산광역매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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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브르에는 ‘모나리자’, 이곳에는…
서관은 규모도 규모지만, 소장품 측면에서도 미술관의 핵심으로 꼽힌다. 미술관의 최대 대표작으로 꼽히는 작품인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지네브라 데 벤치’(Ginevra de’ Benci)도 이곳에 있다. 아메리카 대륙을 통틀어 딱 한 점 있는 다빈치의 작품으로, 내셔널 갤러리는 1967년 500만 달러에 사들였다.
이는 당시 내셔널 갤러리가 사들인 가장 비싼 작품으로, 현재는 그 가치를 헤아리기 어렵다. 다빈치 작품이 시장에 잘 나오지 않을뿐더러, 진위가 확실한 작품은 이미 글로벌 미술관들이 소장하고 있어서다. 다만 가장 최근 공개적으로 거래된 다빈치 작품(으로 강력하게 추정되는 것)으로는 ‘살바토르 문디’(Salvator Mundi)가 있다. 2017년 크리스티 뉴욕에서 4억5030만 달러(약 6024억원)에 낙찰됐다. 당시 한국 미술시장의 한 해 거래액이 5000억원에 채 못미치는 상황이었으니, 작품 한 점이 한국 미술시장 전체보다 비쌌던 셈이다.
수천억원 가치의 ‘지네브라 데 벤치’는 전시장 가운데 좌대 위에 올려진 상태로 전시돼 있다. 누구나 앞면과 뒷면을 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가로 38.1㎝, 세로 37㎝ 크기로 그다지 크지 않다. 미술관 연구에 따르면 이 작품은 원작은 이보다 큰데, 훼손으로 잘려나간 것으로 보고 있다. 다빈치가 20대(1474년에서 1478년 사이)일 때 완성한 초상화로, 그가 제작한 최초의 오일 페인팅이다. 또 여성을 야외 배경에서 그린 급진적인 그림이기도 하다(16세기 여성 초상은 대부분 실내를 배경으로 그려졌다). ‘모나리자’가 다빈치가 50대일 때 완성한 작품임을 감안하면, 꽤 일찍부터 배경이나 인물화에서 다양한 실험을 했음을 알 수 있다. 뒷면에는 리히텐슈타인 인장이 찍혀 있는데,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기록에선 리히텐슈타인 왕자 요한 아담 안드레스 1세가 1712년 구매한 것으로 나온다. 250년 넘게 왕가에서 보관하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왕가의 재정을 위해 매물로 나왔다.
당시로서는 천문학적 금액인 500만 달러에 구매한 작품이 유럽에서 미국으로 넘어오기 위해선 배송도 문제였다. 책임자였던 내셔널갤러리 그림보존 전문가 마리오 모데스티니는 리히텐슈타인 성 지하에 걸려있던 작품을 최대한 원상태로 가져오기 위해 나무로 크레이트를 짜는 대신 여행용 가방을 개조했다. 이때 사용한 가방이 바로 ‘아메리칸 투어리스터’다. 스티로폼으로 내부를 보강해 온습도를 조절했던 것. 작품은 취리히에서 뉴욕까지 ‘모데스티니 여사’라는 이름으로 1등석을 타고 날아와 미술관에 안착했다.
1967년 3월17일 작품이 대중에 공개되자, 초상화를 직접 보고 싶은 관객이 몰렸다. 한 시간 만에 1000명 넘는 관람객이 찾았다고 한다. 이후 뉴욕타임즈에는 ‘다빈치 마스터피스가 아메리칸 투어리스터 가방에 담겨 대서양을 건너왔다’는 광고도 실렸다.
▲ 클로드 모네 작 ‘양산을 쓴 여인’(1875). (사진=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 © 울산광역매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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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에도 고흐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그린 자화상, 클로드 모네가 아내 카미유를 모델로 그린 ‘양산을 쓴 여인’, 드가의 소녀상 ‘리틀 댄서’(Little Dancer) 등도 서관에서 전시중이다. 드가의 회화도 걸작이지만, 3차원 조형을 실험했던 조각은 작가정신이 가장 잘 드러나는 매체로 꼽힌다. 색소를 칠한 밀랍에 면 소재의 몸통, 사람의 머리카락, 린넨 슬리퍼까지 말 그대로 ‘혼합 매체’다. 소녀도 여성도 아닌 그 사이 그러나 불안함은 없고 ‘프로 무용수’로서의 자신감이 가득하다.
국립미술관답게 ‘미국(다운)미술’에 초점을 맞춘 것도 흥미롭다. 유럽의 아류가 아닌 미국 미술의 정체성을 찾기는 작가들의 오랜 과제였을테다. 광활한 서부 풍경을 묘사했는데 중세시대 성이 놓인 풍경화나, 아메리칸 버펄로를 말을 탄 채 사냥하는 미국 원주민은 유럽의 유명 장군들의 초상과 형태적 유사성이 쉽게 보인다.
방대한 규모의 서관을 관람하고 나면, 그 다음은 현대미술의 보고인 동관이다. 규모는 서관에 비해 현저히 작지만 그렇다고 동관을 가볍게 지나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서관과 연결된 지하 통로를 지나면 알렉산더 칼더의 대형 조각이 가장 먼저 관객을 맞이한다. 벽을 장식한 엘스워스 캘리, 사이 톰블리를 지나 전시장으로 들어서면 피카소, 모딜리아니가 차례로 펼쳐진다. 층을 올라가면 앤디 워홀, 잭슨 폴록, 로버트 마더웰, 바스키아 등 미국 현대미술의 정수가 모여 있다.
꼭대기 층에는 마크 로스코와 바넷 뉴먼 전시장이 별도로 마련됐다. 대상을 ‘재현’하는 것으로 미(美)를 추구하던 기존 미술사에서 벗어나, 형태가 아닌 색으로 숭고함을 이끌어내려 했던 두 작가는 비슷한 듯 다르지만, 미국 추상미술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들로 꼽힌다.
거장들의 작품을 다 보고 옥상 정원으로 나오면 거대한 푸른 수탉이 눈길을 끈다. 현재 내셔널 갤러리 대표이자 글렌스톤 미술관을 이끌고 있는 미첼 레일즈의 기증품이다. 그리고 옥상정원 한쪽 끝에는 TV를 바라보고 있는 부처 조각이 있다. 한국 관객들이 그냥 지나갈 수 없는 백남준의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