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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역 에세이> 숲, 날 들이다
 
민은숙 시인   기사입력  2024/09/08 [18:34]

▲ 민은숙 시인

 간밤의 일기예보가 불청객 소식을 전한다. 설렘이 걸친 우산을 들고 나선다. 새벽까지 뜬눈으로 보낸 뿌연 하늘이 내리덮은 시야가 눅진하다. 들뜬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라 일러주는 듯하다.

 

 약속 시간보다 일찍 당도했으나 발 빠른 선생님들이 이미 와 있다. 떨어지는 빗방울이 여행으로 설레는 마음의 농도에 고개를 떨군다. 버스에 화사한 계절이 가득하다. 늘 잔잔한 물처럼 느껴지는 S 선생님의 떡에는 푸른 숲을 넣었다. 연두색 녹두가 씹히는 맛이 일품이다. 

 

 우아한 G 선생님의 차분한 안내로 편안히 한택식물원에 도착했다. 추적추적 비가 내린다. 마음에 묵은 앙금이 있다면 모두 씻어내라는 것일까. 식물원 입구에서 물비늘이 의심되는 냄새가 올라온다. 평소 냄새에 민감한 편은 아닌데. 하늘의 날개가 떨군 빗물과 흙의 접촉이 제법 생생하게 콧속으로 스며든다. 세상의 때를 모조리 헹구는 식물들이 온몸을 떨어내고 있다. 갓 세수한 말간 얼굴로 나무들이 우릴 맞이한다. 선명한 제 본연의 색을 뽐내는 튤립과 노란 수선화가 식전주를 제공하듯 사뭇 경쾌하다. 완연한 봄을 온몸에 바른 자연이 겨우내 움츠렸던 마음의 우산 살을 편다.

 

 물기가 내려앉아 자연을 추켜세운다. 저 높은 곳에서 내려온 눈물이 흙에서 태어난 숨탄것들의 불순물을 모두 지워낸다. 누구를 띄우기 위해 자신을 낮추는 미덕은 쉽지 않다. 저마다 자신의 공적을 내세워 조금이라도 뜨고 싶어 한다. 때로는 스스로 뜰 수 없는 얕은 힘에 굴복하지 않고 타인의 공적을 가로채기도 하지 않던가. 이렇게 자연은 말없이 보여준다. 

 

 양쪽에 늘어선 금낭화가 초록해지는 눈동자를 낚시하고 있다. 요정을 닮은 꽃들이 찌로 낚싯대에 매달려 있다. 멀리서 보면 커다란 분홍 방울을 흔드는 듯하다. 오, 하얀 금낭화가 우리의 시선을 낚아 올렸다. 분홍을 젖힌 하얀 금낭화는 절 발견한 기쁨에 취하라 잠시 시간을 꼭 붙잡고 있다. 요정 위에 짙은 무언가 보인다. 마치 코브라 같다. 죽은 나무가 꺾이고 남은, 내 팔 만한 외양이 제법 매섭다. 금낭화를 잘못 건드리기라도 한다면 금방이라도 대가리를 들이댈 천연물은 천진무구한 꽃들을 지켜주는 듯하다. 우리 둘을 호위하는 S 선생님만 같다. 뒤처진 우리가 혹시나 길을 잘못 들기라도 할까. 묵묵히 뒤에서 받친, 유독 키가 큰 우산이 든든하다. 잠시 묶인 우리의 시선이 참새떼의 비상에 이내 발길을 재촉한다.

 

 이름 모를 식물도 이름이 있다. 수필로 하나 된 우리는 이 숲과 연이 닿았다. 식물을 꽤 꿰고 있는 해설사의 설명은 예상보다 짧았다. 서운하진 않았다. 우리에겐 그에 못지않은 지식 전달자가 있다. 해설의 뒤가 궁금한 사약의 재료인 천남성의 부연을 마저 들을 수 있었다. 사약의 사는 죽을 사가 아닌 임금이 내린다고 하여 줄 사라 한다. 사약은 뿌리로 만든다. 죽음을 부르는 재수 없는 식물쯤이야 까짓 뽑으면 된다고 의기양양할 수가 없다. 우리의 뿌리는 같은 흙이 아닌가. 외풍에 쉽게 뽑힌다면 깊고 넓게 뿌리내리지 못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바람에 잠시 흔들릴지라도 굳건히 지키는 천남성이 자궁경부암 환자 치료에 유의미한 효과를 거둔다고 한다. 사람을 살리기도 죽이기도 하는 식물이라니. 거대한 자연의 품에서 삶의 해답을 구하고자 숲을 찾는 건지도 모르겠다.

 

 자연은 언제나 평정을 유지한다. 그 동심원 안에서 호모 사피엔스라며 기고만장한 시류에 휩쓸리곤 했다. 나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뿌리로 넓고 깊게 지탱하지도 못하면서 웃자란 아이의 가지를 흔들지 않았는지 떳떳할 수가 없다. 전나무 위에 잠시 머문 구름이 먹먹한 날 가린다. 흙을 점령한 도시의 무미건조한 밤이면 긁적거리느라 단잠에서 튕겨 나온 아이가 뒤척였다. 임시방편으로 연고를 발라주곤 했다. 살이 접히는 부위에 딱지가 내려앉다가 제때 아물지 못하고 피가 맺혔다. 여름방학이라 신이 난 아이는 시댁인 자연에서 작대기 하나 들고 모글리처럼 뛰어다녔다. 흙과 뒹굴고 나무와 숨바꼭질하면서 깊은 잠에 빠졌다. 방학이 끝나갈 즈음 아이의 피부는 그을린 자기처럼 윤나고 매끄러웠다.

 

 자연에 동화되는 동안 숲이 곱게 나를 물들였다. 간밤 잠을 놓쳐 핏발 선 눈이 시원하다. 녹음이 지압하고 화사한 꽃물로 씻긴다. 함께한 시공간이 마음 밭에 수놓은 자수에 미소가 배어난다. 물줄기가 앙금을 떠안고 씩씩하게 내려간다. 낮은 자세로 자연을 추앙하여 날 깨운 소명을 완수했나. 뿌옇던 하늘의 동공이 선뜻하다. 우리 수필의 앞날을 축복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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