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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역 에세이> 이름 없는 그녀
 
노 강 시인   기사입력  2024/10/03 [17:18]

▲ 노 강 시인

 그녀는 참으로 많은 자녀를 낳았다. 8명의 자식을 두었지만, 전쟁은 그녀에게 너무나 잔인한 시련을 안겼다. 첫아이와의 생이별. 돌도 되지 않은 아이는 평양에 계신 할머니께 맡겨졌고, 그녀는 남편을 따라 남으로 피난을 떠났다. 어린 자식을 두고 떠나는 그리움은 그녀의 마음을 평생 눈물로 물들게 했다. 그 와중에 감또개처럼 가버린 자식들을 가슴에 묻어야 했고 6,25 전쟁 중 1,4후퇴 때에는 인민재판을 피하기 위해 남편의 장교복을 한강에 묻어야 했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모진 삶을 버텨내야 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남편의 유신 반대 운동으로 좌천되어 강원도 태백으로 발령받아 탄광촌으로 가야만 했었고 거기서 석탄을 줍기도 하였다는 그녀는 위로받거나 쉴 틈도 없이 세월은 그녀의 삶을 덮었고, 나이가 들어가며 이름조차 희미해졌다. 본래의 이름은 세상 속에서는 사라졌다. 자신의 살을 찢어 8명의 자식을 출산하고 온 마음을 다해 키워주신 그녀의 얼굴과 손은 삶의 지도처럼 깊어진 주름 골짜기였지만 80대 초반에 성인병 한 번 없이 주무시듯 평온하게 세상을 떠나셨다. 그녀의 떠남은 마치 그 긴 고통의 삶을 조용히 마감하는 듯했다.

 

 그녀는 평양 정의여고를 졸업하고, 연희간호전문학교(현 연세대) 1회 졸업생이다. 그녀의 동창이었던 연대 간호학과 전산초 교수와 세브란스병원 이성덕 간호부장은 내 생명의 은인이다. 나는 십 대 초반에 버짐 꽃 만발한 영양실조와 결핵으로 임파선에 문제가 와서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았을 때, 그분들은 수술비를 마련해 주시고, 병문안을 오시며 내 회복을 위해 마음을 써주셨다. 그 은혜를 나는 평생 잊을 수 없다. 그녀와 친구들의 보살핌이 없었다면, 오늘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그녀의 출산은 단순한 육체적 노동이 아니었다. 하느님의 창조사업에 동참하는 거룩한 일로 받아들이셨다. 육신의 고통을 안고도 자연의 순리를 따랐고, 그 안에서 자신을 찾으셨다. 그녀가 나에게 물려준 것은 단지 유전적 건강이 아니라, 여성만이 해 낼 수 있는 생명에 대한 잉태와 신비를 치를 수 있는 출산이라는 고유 영역에 대한, 삶을 바라보는 깊은 통찰이었다. 부모가 된다는 건 자신의 몸을 삭혀서 자식에게 생명을 주는 거룩한 소명이기에, 나 역시 90년대 하나 낳기 운동이 정부 정책 일 때 네 명의 자녀를 낳았다. 내 인생에서 가장 잘 한 선택은 그녀의 영향을 받아 아이들을 많이 낳은 것이다.

 

 그녀는 글 솜씨도 탁월하셨다. 유학 중인 아버지께 보낸 편지가 얼마나 아름다웠던지, 그 시절 유학생들이 돌려가며 읽었다고 한다. 그녀가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은 글을 남기셨을까? 하지만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 가족을 돌보는 가사노동은 그녀를 억눌렀고, 그 속에서 그녀는 자신을 드러내지 못한 채 살아오셨다. 그녀의 삶을 기억 속에서 꺼내려 하니, 그리움이 밀려와 마음이 먹먹해진다. 그녀의 빛나는 재능을 묻어둬야만 했던 그 시절이 아프게 다가온다. 그녀의 이름은 세상이 기억하지 못하고 잊혔지만 나의 가슴에 살아 계시는 이름 단  하나밖에 없는 나만의 고유 언어 “어머니”이시다.

 

 최근 추석에 부모님을 위한 연미사(천주교식 제사)를 드리며, 세월이 흘러도 멈추지 않는 눈물이 나를 적셨다. 추석은 떠나신 부모님을 기억하고 그분들의 희생을 다시금 새기는 날이다. 그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있고, 나의 자녀들이 있는 것이다. 부모님을 이렇게라도 기억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그리움과 감사를 동시에 느끼는 시간이었다.

 

 작은 마당 한쪽에 봉선화와 나팔꽃을 직접 심으시고 꽃이 피면 좋아하셨던 어머니는 뜨개질도 잘하셨고, 평양 요리를 잘하셔서 고지학순 주교님도 초대하셨던 기억이 있다. 명절이면 손수 머루주, 만두, 잡채, 녹두지짐을 하셨고 지금도 먹고 싶은 동치미가 그립다. 찹쌀떡을 하시면 나는 앙꼬만을 빼서 먹다가 혼나기도 하였던 기억이 있다. 배우 고 윤정희처럼 고우셨던 어머니는, 양 갈래머리를 하고 직접 만든 한복을 입고 찍은 사진을 나는 오랫동안 간직하기도 하였다. 어머니가 손수 짜주신 털 스웨터는 아직도 보관하고 있다. 어머니가 그리울 때면 나는 그 스웨터를 입어보곤 한다. 한 올 한 올, 어머니의 손길이 느껴지고 봉선화 꽃물이 물들어 있는 그 스웨터 속에서 나는 어머니의 따뜻한 품을 다시 만난다.

 

 어머니라는 존재는 “신이 바빠서 어머니를 보내주셨다”라고 한다. 이제 그녀가 떠난 자리에서 나는 엄마가 되었고 나의 자녀 역시도 엄마가 될 것이다. 

 

 어머니, 당신이 너무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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