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이 바뀔 때 옷장을 살펴보면 이제는 필요 없어진 옷과 맞지 않는 옷들이 눈에 뜨인다. 우리의 생각도 이처럼 필요 없거나 맞지 않아 정리를 해야 될 때가 오곤 한다.
얼마 전에 나는 뜻밖에도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에 질문자로 채택되었다. 기쁘기도 하고 긴장도 된 어정쩡한 얼굴로 질문자석에 앉아 사람들로 붐비는 장내를 둘러보았다. 열 명 정도 되는 질문자의 대부분은 삼사십 대로 보였다. 한창 생의 현장에서 뛰다가 부딪치게 되는, 삶이 던져주는 문제들을 풀어보려고 왔을 것이다. 그럼 이미 내 몫의 삶을 거의 다 살았고 인생을 관조할만한 나이가 된 나는 왜 지금 여기에 앉아 있는가? 내가 가지고 있는 질문을 속으로 곱씹어 보았다.
“연세도 드셨는데 이제 ‘형님’이라고 부를까요?”
몇 주 전에 같은 성당에서 십년도 넘게 알고 지낸 자매님이 불쑥 물어왔다. 지난번에 만났을 때는 아무렇지도 않게 “자매님”이라고 부르던 칭호가 왜 오늘 “형님”으로 바꿔져야 하는지 당황스러웠다. 나 혼자만 나이를 먹어서 호칭상승이 필요한 것도 아닐 텐데... 하긴 요즘와선 가족 모임에서도 이런 위화감을 느낄 때가 종종 있곤 했다. 집안대소사에 내 의견을 말하기라도 하면 딸이나 아들 며느리 하나 같이 자기들이 알아서 할 테니 신경 쓰지 말라고 한다.
그럴 때면 묘한 기분에 휩싸이게 된다. 탄탄하게 굳은 땅이라고 생각했던 내 발밑의 지반이 미세하게 균열되어 흔들리는 느낌이라고 할까, 나라는 한 인간으로서의 존재감이 무너지고 갑자기 무기력하고 초라한 노인이 되어버린 것 같다고 할까, 앞으로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날 텐데 어떤 마음의 자세를 갖추어 대비해야 할 것인가.
내 순서가 되어 마이크 앞에 섰다. 법륜스님의 얼굴을 보며 질문을 하라는 봉사자의 부탁을 되새기며 칠순이 된 스님의 얼굴에 시선을 집중시켰다. 한 달이나 되는 긴 여행 끝에 이 강단에 앉은 그분의 얼굴은 피로감 하나 없이 소년의 것처럼 해맑았다.
두서가 맞기나 했는지도 모르는 물음이 끝났을 때 스님은 잠깐 내 얼굴을 주시하더니, 질문자는 늙는다는 것에 대한 열등감이 있는 것 같다, 늙는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일 뿐이며 열등하게 여길 아무런 이유가 없다라는 대답을 하셨다. 나로서는 심각한 질문이었고 정신이 번쩍 들 글귀나 법문을 주실 줄 예상했는데, 일상에 흔히 쓰이는 “자연적 현상”이라는 단어로 일축해버리는 스님의 말씀이 좀 실망스러웠다. 그리고 집안일에서 소외되는 느낌에 대한 답은 단호했다.
“설사 젊은 사람들이 ‘어떻게 할까요?’ 라고 물어도 내가 손사래를 치며 ‘난 이제 그런 것 몰라. 너희들이 알아서 해’라고 해야지. 뭘 그리 연연해하나요?”
나이에 걸맞게 집착을 내려놓으라는 뜻이었다. 한 가정의 주부로써, 아내로써, 어머니로써,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써, 내가 일생동안 이루어놓았다고 자부하는 것들을 다 내려놓으라고, 내 마음의 옷장 안 높은 선반에 소중하게 올려놓았던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재정비하라는 뜻으로 들렸다. 다 내려놓으면... 그럼 나는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허리 주변이 서늘해지면서 가슴께가 휑하게 비어버린 듯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속에서 즉문즉설에 동행했던 분께 물었다.
“선배님은 나이 드는 것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셨어요?”
그분은 나이에 대한 수필까지 쓰셨고 항상 당당하고 활기가 넘치는 분이었다. 그분은 주저 없이 대답했다.
“글쓰기지.”
그분으로서는 가장 당연한 대답이었다.
“글쓰기는 ‘창조하는 것’이거든.”
눈앞에 불이 번쩍했다. “창조”라는 두 글자가 눈앞에서 명멸했다.
‘그렇다. 지금은 창조의 시간, 옷장재정비를 할 시간이다. 미련 없이 선반에 쌓여있는 것들 다 내려다가 오늘과 아우른 재창조의 재료로 삼는 거다. 매일 새 순을 틔우듯이, 늘 새롭게.’
누가 나를 어떻게 부르든, 어떻게 대하든 그건 그들의 과제이지 내 일이 아니었다. 내 안의 심저에는 매 순간 창조의 새싹이 움트고 있으니까.
법륜스님의 “자연스런 현상”이라는 말씀이 재조명되어 다가왔다. 나이 들어서 늙는다는 소멸의 현상도 생성과 함께 자연에서 부단히 연속되는 창조의 한 과정이 아니던가. 그리고 나도 소멸되고 생성되는 그 자연의 일부가 아니던가.
앞으로도 끊임없이 재정비의 순간은 다가올 것이고, 나는 나에게 주어진 오늘 하루 몫의 자연현상을 살아가면 되지 않겠는가.
약력: 울산 대현면 매암동 출생
2011년 제 13 회 재외동포 문학상으로 등단
현재 미주문협 회원,
Korean American Literature Academy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