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의 영광이란 말이 있다. 한 가문에 나라에서 주는 훈장을 두 분이나 받았다면 대단한 가문의 영광이다. 나의 외숙모 김 소화 선생은 울산에서 태어나 평생 울산에서 교육자로 지냈고 모란 훈장을 받았다. 훈장을 받으러 가시는 날 입은 옷이 국민복 같이 너무 검소해 “외숙모 옷이 너무 초라해요. 청와대 가시는데, 제가 옷 한 벌 사 드릴게요” 했지만 평소대로 가신다고 했다. 광복 60주년에 여 운영 선생 이하 독립운동가들에게 건국훈장 훈장이 추서됐을 때 이동개 외삼촌도 이에 포함돼 애국 훈장을 받았다. 돌아가시고 65년 만에 훈장이 추서됐다.
지난 1996년 8월 윤재근 교수가 집필한 ‘근촌 백관수’가 출간돼 내 앞으로 왔다. 근촌은 조선이 기울어져 가는 1889년 전북 고창에서 태어났다. 청년 시절 인촌 김성수 고하 송진우와 만나 조국의 미래를 고민하고 신학문을 배워 나라를 찾겠다는 일념으로 동경 유학을 떠났다.
그곳에서 재일본 동경 조선 청년 독립단을 창단했고 발기인 8명과 2.8 독립선언문을 작성했다. 1919년 2월8일 호랑이 굴인 동경 한복판 조선 기독 청년회관에 독립을 갈망하는 600여명의 유학생들이 모인 가운데 근촌이 피가 절로 끓을 정도로 담대하게 선언문을 낭독하자. 장내는 곡성과 우렁찬 대한독립 만세 소리로 가득했다고 한다.
1919년 3·1 독립선언문의 기폭제가 된 2·8 동경 독립선언문은 이광수가 작성했다고 한다. 그러나 근촌 백관수 선생이 초안해 윤곽을 잡고 이광수가 마지막 교정을 보았다는 것이다.
이광수의 문장은 명문이었지만 사상과 이념 문제에서 근촌의 생각과 다소 차이가 있어 근촌이 고심 끝에 3차에 걸쳐 다듬었다고 한다. 3·1 기미 독립선언문이 인도적 민족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것과 달리 2·8 독립선언문은 강렬한 저항적 민족주의를 담고 있다. 기미 독립선언문은 주로 도의에 호소하고 있는 반면 2·8 독립선언서는 최후의 1인까지도 혈전에 나설 것을 촉구하고 있다.
주동자 8명이 일본 형사에게 잡혔으나 모두 혼자 한 일이라고 주장해 동료들을 모두 석방 시켰다. 청년 백관수도 일본 판사 앞에서 “판사님 당신의 나라가 빼앗겨도 당신은 침묵하시겠습니까”고 되물었다. 판사는 3개월 징역형을 선고했다.
‘혹한의 겨울 옥방에서 한시 쓰다’라는 책을 통해 두 개의 독립선언서가 있다는 사실과 근촌 백관수 선생을 알게 되었다.
선생은 해방 후 남한 단독 정부를 세운 이승만 대통령에 맞서 싸웠다. 그는 한 시대의 꺼지지 않는 양심으로 선비 정신을 이어 온 애국자다. 그는 1950년 7월 자택에서 북한 정치보위부원들에게 납치돼 납북됐다. 북에서도 김일성에게 꺾이지 않는 올곧은 정신으로 ‘재북 평화통일 촉진위원회’를 결성하고 납북 지식인을 제거하는 김일성에게맞서는 기질을 굽힐 줄 몰랐다고 한다. 근촌 선생은 평북 선천 결핵 요양원에서 남쪽의 가족을 그리워하며 평생 독신으로 사시다 폐결핵으로 1961년 72세에 생을 마감한 것으로 전해진다. 근촌 선생은 결핵 요양원에서 간호사에게 “통일이 되면 남쪽 신랑감을 구해 주겠노라”고 했다고 한다. 죽는 그날까지 통일을 바라다 영면한 것으로 추정된다.
역사는 언제나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 지금 우리는 광복의 기쁨도 전쟁의 상처도 말끔히 잊고 살아 간다. 하지만 가끔 ‘과연 조국은 나에게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던지곤 한다. 근촌, 백범, 동주 시인을 그리며 그들이 조국임을 깨닫는다. 그들의 생환을 불러오는 씻김굿이라도 한바탕 벌리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