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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를 읽는 시간] 문요한
 
울산광역매일   기사입력  2023/06/21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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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과 의사가 인간관계에 대해 쓴 책입니다. 상대방과 가까와지면 의도치 않게 상처를 주고 받을 수 있는 것이 인간관계의 본질이라면서 필연적으로 관계마다 적당한 거리를 되찾아서 나답게 살아가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어떻게해도 관계가 개선이 안된다면 관계의 틀을 바꿔보라는 것이 이 책의 핵심입니다. 이 책을 보면 요즘 사람들이 얼마나 관계때문에 어려워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어려움의 깊은 본질에는 '나'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나를 살리기 위해 가장 나다운, 나 중심의 해결이 과연 진정한 해결이 될 수 있을까?가 이 책을 읽고 난 후 드는 생각입니다. 

 

어쩌면 이렇게 관계에 어려움을 겪는 이유는 내가 지극히 나 중심으로 살았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세상의 가르침은 모두 나중심입니다. 내가 세상의 중심이라고 배우고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라고 어릴때부터 배웁니다. 나다운것이 가장 중요하고 내 인생의 결정은 내가 해야 한다고 반복적으로 계속 배웁니다. 물론 타인과의 관계도 배우긴 하지만 타인에게 잘하고 관계를 좋게 만드는 중심에는 이타주의라는 프레임이 씌워져 있고 그렇게 하는 진짜 중요한 이유는 나 개인의 만족에 있습니다. 물론 매슬로우의 욕구단계 이론처럼 이 욕구는 지극히 생리적이고 본능적인 욕구도 있지만 자아실현을 하고자 하는 욕구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모둔 욕구의 중심에는 내가 있습니다. 그 욕구가 아무리 고상하고 세련되고 남과 세상을 위한 것이라고 해도 말입니다. 

 

다시 말, 마음의 수양과 삶의 성장에 포커스된 이책의 주제 역시 나를 살리는 것이 목적인 것 같습니다. 사람마다 건강한 거리가 있다는 것은 정말 맞는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영국속담에 영국인들의 집은 그의 성이라는 말이 있는것처럼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중시하는 것은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기본적인 예의가 될 것입니다. 아들러가 이야기한 것처럼 인간의 고민은 모두 인간관계에서 오는 고민이다라는 말이 참 맞는 말인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고통스러운 관계를 벗어나기 위해 직장을 퇴사하거나 학교를 관두거나 모임을 단절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관계에서 벗어나도 또 다른 사람을 만나면 비슷한 관계의 방식을 되풀이하다 또 다시 고통에 빠지는 악순환이 되풀이된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이런 문제가 우리도 모르게 어린시절의 관계방식으로 성인이 된 오늘의 관계를 맺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저자는 이의 해결방법으로 바운더리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우리말로 경계나 영역이라는 말이 있지만 보호와 교류 양면을 강조하는 바운더리의 의미보다는 치우친 느낌이 들어 그대로 바운더리라는 외래어를 쓰고 있습니다. 관계를 재구성하라는 메시지입니다. 인간은 다른 사람뿐 아니라 자신까지 속일 만큼 관계를 중요시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자는 자기 희생에 바탕을 둔 선은 미숙함일뿐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이 좀 의아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자기희생을 바탕으로 친절을 베푸는 사람들은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늘 보상을 요구한다고 합니다. 이 말을 좀 곰곰히 생각해봤습니다. 과연 그런지 나 자신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저자가 말하는 미숙한 착함은 인간관계를 일종의 거래로 본다고 합니다. 끊임없이 계산을 하면서 채권자 마인드를 놓지 않는다고 합니다. 심지어 저자는 이들이 상대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과잉친절을 베풀어서 인간관계를 채무관계로 만들어버리고 계속 친절을 베풀어 빚을 늘려놓는다고 말합니다. 이 대목은 좀 서글퍼집니다. 친절을 일종의 거래의 수단으로 보고 관계의 빚을 늘려놓고 상대방이 갚지 않으면 폭발해버리는 것이 결국 그 사람의 잘못이라고 봐야 할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런 관계지능을 통해 처세술을 극도로 단련하는 책들도 많이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관계를 단절하고 싶을때는 거절할 수 없는 친절을 과하게 베풀어 관계를 끊어버리라는 조언을 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는 스스로 줘놓고 나중에 빌려준 것이라고 돌려다라고 하니 당황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 정신과 의사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인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도 결국 보상을 바라지 말고 좋은 일을 하라라는 의미로 해석합니다. 물론 맞는 말이지만 지극히 인본주의적인 관점입니다. 이 문장에서 가장 중요한 한분이 빠져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는 인정을 바라지 말고 좋은 일을 하라라는 뜻이기도 하지만 복음적으로 보면 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고아와 같이 세상에 홀로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 일을 하는 사람의 배경에는 그 안에 성전되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에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말이 있는 것은 복음가진 구원받은 자는 어떤 순간에도 혼자가 아닙니다. 그래서 그가 하는 모든 일과 말은 모두 그 사람과 함께 계시면서 그 안에 내주하고 계시는 성전되시는 성령하나님이 알고 계신다는 것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좋은 일을 하면서도 남들이 안알아줘도 상관없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고 구원으로 모든 것을 다 받았기 때문에 감사함으로 헌신과 봉사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책에서 미숙한 선함을 이야기할때 자존감을 이야기하지만 구원받고 하나님이 그 안에 성령으로 내주한 성도에게는 그 어떤 것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높은 자존감을 갖게 됩니다. 바로 갈라디아서 2장 20절,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만 살아계신다는 고백처럼 내 안에 창조주 하나님이 살아계시기에 세상 그 어떤 자존감과도 비교할 수 없는 완벽한 하나님이 나의 배경이자 나의 주인으로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구원받지 못한 사람의 관계는 아무리 바운더리를 만들어 선을 지키며 사람마다 나름의 바운더리를 적용해서 나를 지켜도 결국 한계에 부딪히게 됩니다. 심지어 이런 상처의 가장 큰 가해자는 대부분 가장 가까운 사람들일때가 많고 가족, 부부, 부모, 형제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그러나 이 책에 쓴 것처럼 자신이 상처를 준 사람은 없습니다. 이상한 것은 세상에 상처를 받았다는 사람은 넘치는데 정작 상처를 준 가해자는 거의 없다는 점입니다. 

 

저자가 이야기한 '우리'의 개념은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관계가 친밀해지면 너와 나의 관계가 모호해지고 상대방이 나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는 점입니다. 이는 우리라는 아주 좋은 관계가 되기도 하지만 역으로 서로의 바운더리가 겹쳐지면서 끊임없이 서로를 알아주기를 바란다는 점입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애착관계는 잘못하면 유아적 애착을 넘어 집착으로 넘어갈수도 있다는 점을 경계하라고 말합니다. 이는 상대방을 소유하려는 소유욕으로도 발전할 수 있기 때문에 자칫하면 파국으로 갈수도 있다고 합니다. 유아의 애착관계는 정상이지만 성인의 애착욕구는 파국으로 끌고가는 원인이 된다고 합니다. 

 

내면의 결핍을 관계를 통해 치유하려는 사람은 소유욕이 높은 사람들의 특징이라고 합니다. 가까워지면 타인과 나를 개별적인 사람이라고 판단하지도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 사람은 상대방에게 잘해주고 상대방이 자기만큼 해주지 못하는 것에 대해 신경질적으로 반응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가스 라이팅이라고 불리는 감정을 조정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등장합니다. 읽어보면 고개가 끄떡여지는 내용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티움이라는 라틴어가 이 책의 마지막에 등장합니다. 행위의 보상이나 결과와 상관없이 그 행위자체가 나에게 기쁨을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능동적인 여가 정도로 번역할 수 있는데 이는 사람마다 다르다고 합니다. 일종의 건강한 취미일수도 있고 반려동물을 키우는 것도 포함이 됩니다. 이 글의 말미에 오티움이 어쩌면 이런 인간관계의 실마리를 풀 수 있는 방법이 될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아가 충분히 발달하여 상호교류가 되면 연결감이 확장되면서 바운더리가 희미해진다고 말합니다. 나의 개념이 우리의 개념으로 확장되어 간다고 합니다. 

 

그러나 결국 나에서 우리에 머물뿐입니다. 복음가진 사람에게 오티움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묵상이 될수도 있습니다. 그 묵상이 나의 오티움이 되고 그런 사람들이 가정을 꾸린다면, 사회를 이루게 된다면 그 사회는 바로 초대교회같은 행복한 사회가 될 것입니다. 결국 이 모든 인간관계의 핵심은 나의 문제를 푸는 것이고 그 방법은 구원뿐입니다. 구원받은 나는 더 이상 바운더리에 메일 필요도 없고 바운더리를 지키느라 신경을 쓸 필요도 없습니다. 누군가를 속박하거나 집착하지도 않습니다. 요한복음 19장 30절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예수님때문에 내가 진정으로 모든 것에서 해방받았기 때문입니다. 바운더리를 이해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구원입니다. 

[출처] 2023년 6월 21일 오늘의 책 : [관계를 읽는 시간] 문요한 (문헌정보팀 WE) | 작성자 문헌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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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3/06/21 [09:31]   ⓒ 울산광역매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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