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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와 ‘위하여’의 사이에서
 
안중욱 울주군 삼남교회 목사   기사입력  2016/01/06 [15:22]
 
▲안중욱 울주군 삼남교회 목사
나는 87년 신학대학생으로 시작하여 교육전도사, 풀타임 전임 전도사 시절을 거치며 95년 목사가 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목회자 생활을 통해 공동체를 더 중시하는 성향이 몸에 베이게 되었다. 결혼을 하고 3명의 자녀를 둔 아버지가 되었지만 더욱 나는 가정보다는 교회 공동체의 안위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목회 훈련을 통하여 훈련받은 것 중 하나가 섬김과 사랑의 사역을 통해 복음을 증거하는 사명자라는 사명자의식이었다. 이런 사명의식은 교회가 조금이라도 유익하다면 개인적 권익을 내려놓아야 함을 꼬집어 말하지 않아도 터득하였다.
 
개인적인 고충을 자세히 표현하는 것은 세속적(?) 태도로 여기게 되었다. 중소형 교회에는 경제적으로, 사회, 의학적으로 힘들고 어려운 분들이 많은 것이  현실이다. 어려운 이웃들을 만나면 최선을 다해 돕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절박한 사명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나도 모르게 아내에게도, 부모 형제,  친지들에게도 (처음엔 미안한 마음이었지만), 우리가 신앙인이니까 교회 공동체의 약자들을 ‘위하여’ 도움을 주장했다. 어려운 저 분들을 도우며 살자는 선행을 독려하는 것이 일상적인인 내 일이 되어 갔다. 점점 나는 모든 분들에게 허리띠를 졸라매 선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은연중에 압력을 가했지만 나는 모르고 지냈던 것이다. 아이들이 태어나고 영아기, 유아기를 지내는 동안 내 아이에게 필요한 것을 조금이라도 넉넉히 주어지면 목회자로서 이러면 되는가?  화들짝 돌아보기도 했었다. 심지어 공동체를 ‘위하여’라는 주제를 말하지 않으면 주변에서 이상하게 볼 정도가 된 것이다. 내일의 웃음을 위해 오늘을 견디는 삶이 체질화 된 것이다. 내 모습에서 역도선수가 역기를 들기 직전같은 비장함이 풍겨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2015년도 변함없이 개발독재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위하여’의 삶의 강요하듯 살아왔다.

   지난해 연말부터 새해를 준비하면서 평소 같으면 특별한 의미없이 스치고 지나쳐 가든 모습들이 눈에 크로즈 업되는 것이 있었다.  사랑으로 키우던 청년들이 취업을 해 외지로 떠나는 모습, 결혼을 해 이사 준비하는 여 청년, 진학으로 유학 가는 학생들 모습에서 곰삭인 사랑을 못 준 것이 보였다. 교회를 위해 정말로 희생적인 헌신을 해 온 성도들의 거칠어진 손등을 보았다. 정녕, 행복한 공동체를 ‘위하여’의 삶을 2015년에도 쉬지 않고 달려왔건만 현장에는 여전히 힘겨움이 애잔하게 흐르고 있었다. 초등학교 어린이들도, 중고등부 청소년들도 건성으로 내게 왔다가는 후다닥 스쳐가는 보이지 않는 유리막이 느껴짐은 무슨까닭일까? 특별한 불평도, 드러난 난제도 없건만 사막처럼 메마름이 왜 목구멍 깊숙이 모래알을 훅훅 불어넣는 것 같은 이 피곤함은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정작 힘있는 상록수로 팔랑거리는 열정을 보여야 할 내 자신도 원인모를 나르시즘에 축축 쳐져 들어갔던 것이다.

     새해를 하루 이틀 앞두고 기도하던 중에 나는 살며시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뭉클 올라오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위하여’의 밧줄에 묶인 포로가 된 내 모습을 본 것이다. 나가 들어간다는 것은 대충대충 지나치던 것을 애정과 관심을 갖고 찬찬히 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기는 것이 아닐까? 한 살 더 먹으면서 나는 강박관념처럼 ‘위하여’의 삶에만 치우친 몰골이 흉하게(?) 울퉁불퉁 부어오른 내 모습을 보았다. 이론적으론 전후, 완급을 고루 갖춘 균형 잡힌 삶의 소중함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지만, 실제 삶에선 ‘위하여’만 추구했지, ‘함께’하는 삶의 잔잔한 정이 고갈되어 갔던 것을 나만 모르고 있었다. 정직히 말하면 ‘위하여’보다는 ‘함께’를 먼저 더 많이 하면서 ‘위하여’의 삶으로 건너가야 했었다. ‘함께’의 삶은 개인의 목소리, 개인의 아픔, 개인의 긴장과 두려움을 있는 그대로 그들의 목소리, 언어로 가감없이 받아주고 이해하고 공감해 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교회와 약한 자를 ‘위하여’의 삶은 자기 안에 있는 상처를 ‘함께’하는 사랑과 거룩한 교제로 치유받고 회복된 사람만이 가능하다는 걸 왜 빨리 깨닫지 못했던가! 크고작은 상처들을 섬세하고 보아주고, 오래 기다려주며, 따뜻하게 보듬어 주는 ‘함께’의 여정이 생략된 삶을 살았기에 내가 그렇게 힘겨웠던 것을 미쳐 알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내 나름대로 ‘위하여’의 삶을 살았기에 그런대로 할 말이 있을 줄로 착각하며 지냈던 것이다. 

   이제, 2016년이 열렸다. 새해엔 어떤 사람을 만나더라도 ‘위하여’의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충분한 ‘함께’의 시간을 충분히 곰국이 되도록 가지고 싶다.  애물단지(?) 청소년들의 자잘한 아야기도, 노인들의 듬성듬성한 이빨 사이로 흐르는 사연들도 저들의 눈높이에 내려가 ‘함께’하는 삶을 살아야겠다. 자신의 정원에 돋아나는 고통스런 찔레나무로 인해 말없이 애처로운 눈빛을 보냈지만 이해를 못하고 지나치던 무딘 지난시간을 반복하지 않기를 기도한다. 피곤하고 지쳐 돌아올 자식위해 따뜻한 밥을 짓는 어머니처럼, 푸근한 이웃집 인심좋은 아저씨처럼 그렇게 내 삶의 많은 이들에게 다가가고 싶다. 특히 나의 무심함으로, 아니 나의 ‘위하여’의 강한 주장에 힘겨웠을 그분들에게 다가가는 한해가 되고 싶다. 특별히 성직자의 아내라는 이유 때문에, 목회자의 자녀라는 까닭으로 ‘함께’보다는 ‘위하여’의 삶을 처절하게 살아왔을 가족들에게,  함께 ‘위하여’의 목표를 향해 달려 주었던 삼남교회 많은 성도들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해 주고 싶다.  ‘그동안 너무 힘들었지! 새해에는 정말로 웃었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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